과학은 축적이 아니라 구조적 전환으로 발전한다
토마스 쿤은 과학의 발전이 선형적이고 점진적인 축적의 결과라는 기존 통념을 비판하며,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과학이 단순히 사실을 쌓아 올려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시대의 과학자들이 공유하는 기본 전제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방식으로 진보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세계를 바라보는 틀이며, 연구 대상, 질문의 방식, 해석의 규칙까지 포괄한다. 예를 들어, 뉴턴의 고전역학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의 전환은 단순한 이론 변경이 아니라, 현실을 이해하는 전체 구조의 전복이었다. 쿤은 이러한 전환이 과학사의 핵심 동력이라고 주장하며, 과학의 진보를 ‘혁명적인 과정’으로 바라보았다.
정상 과학과 위기의 반복적 순환
쿤은 과학의 역사를 ‘정상 과학 → 위기 → 혁명 → 새로운 정상 과학’이라는 구조로 설명한다. 정상 과학은 기존 패러다임에 따라 퍼즐을 푸는 시기로, 과학자들은 새로운 이론보다는 기존 이론의 세부사항을 다듬고, 실험과 관찰을 통해 이론을 보완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존 패러다임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이상현상’이 누적되면, 과학은 위기에 접어든다. 이 위기는 점점 커지면서 과학자들에게 기존의 틀을 의심하게 만들고, 새로운 대안적 이론이 부상하게 된다. 이때 발생하는 것이 바로 ‘과학 혁명’이다. 과학 혁명은 단순한 개선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방식의 세계 해석 체계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후 다시 새로운 정상 과학의 시기가 시작된다. 쿤은 이러한 순환이 과학 발전의 본질적인 구조라고 강조했다.
패러다임 전환은 객관적 진보가 아닌 인식의 변화다
중요한 것은 쿤이 과학을 절대적 진리에 점점 가까워지는 과정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과학 이론은 객관적인 진리라기보다는, 특정 시대의 과학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구성하는지를 반영하는 ‘틀’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했다고 해서 그것이 이전보다 절대적으로 더 ‘진리’에 가깝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과학의 발전은 사실과 논리의 축적이 아니라, 인간 인식과 해석 방식의 변화이며, 이는 종종 사회적, 문화적 요인과도 맞물려 진행된다. 쿤의 이 같은 관점은 과학에 대한 낙관적 진보주의를 해체하고, 지식의 상대성과 구성성을 강조하는 현대 인문사회과학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결국 그는 과학을 절대적 객관성에서 끌어내려, 인간 활동의 일부로 재위치시킨 철학자였으며, 그의 사유는 오늘날에도 ‘지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자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