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형이상학을 넘어 타자에게로 향하다
레비나스는 하이데거 이후의 철학적 흐름에서 벗어나기 위해 철학의 중심을 ‘존재’에서 ‘타자’로 옮겼다. 그는 전통적인 서구 형이상학이 모든 것을 동일성, 주체, 존재의 범주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한다. 이 같은 동일화의 논리는 타자를 자신과 동일한 존재로 해석하거나 소화하려는 폭력적인 성향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타자는 참된 의미에서 ‘타자’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이에 반해 레비나스는 타자성을 침해하지 않는 윤리적 관계를 주장하며, 진정한 윤리란 타자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책임지는 것’이라 보았다. 그는 철학이 존재를 해명하려는 시도에서 벗어나, 존재 이전의 윤리적 명령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타자의 얼굴은 말없이 말한다
레비나스의 가장 독창적인 개념 중 하나는 ‘타자의 얼굴’이다. 얼굴은 단순한 외형이 아니라, 타자의 고유성과 취약성, 그리고 나에게 말 없이 윤리적 요청을 던지는 실존 그 자체다. 그는 “너는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이 바로 얼굴을 통해 무언으로 전달된다고 말한다. 이때 윤리는 논리적 추론이나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존재 앞에서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책임지는 데서 시작된다. 얼굴은 폭력의 대상이 아니라, 나의 자유를 제한하고 그 자유를 도덕적 책임으로 전환시키는 계기다. 중요한 것은 이 윤리적 관계가 상호적인 계약이 아니라, 일방적인 책임이라는 점이다. 내가 타자에게 먼저 반응하고, 그에 대해 책임져야 하는 비대칭적 관계 속에서 윤리는 발생한다. 이와 같은 윤리의 선차성은 인간 존재를 근원적으로 타자 지향적인 존재로 새롭게 조명하게 한다.
윤리적 책임은 존재론보다 앞선다
레비나스는 윤리를 존재론에 앞서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전통 철학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식의 자기중심적 명제를 출발점으로 삼은 것과는 매우 다른 입장이다. 그는 ‘나는 타자에게 책임을 진다, 고로 존재한다’는 윤리적 관계를 인간 존재의 근원으로 보았다. 이런 관점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여러 사회적 문제—난민, 소수자, 타문화—를 대하는 방식에도 깊은 시사점을 준다. 타자를 내 기준으로 판단하고 범주화하기보다, 그 자체로 존엄한 존재로 인정하고 반응해야 한다는 레비나스의 윤리는 현대 사회가 놓치기 쉬운 인간다움의 근본을 되새기게 만든다. 그의 철학은 결코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우리가 타인을 어떻게 대하고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실천의 철학이다. 얼굴을 마주하는 그 순간, 우리는 윤리의 책임 앞에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