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는 정치철학자로서 전체주의, 권력, 자유의 본질을 깊이 탐구했다. 특히 1961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을 취재하면서, 그녀는 충격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아이히만은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강제 수용소로 이송하는 계획을 총괄했지만, 재판장에서 드러난 모습은 광적인 악당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관료였다. 아렌트는 이를 ‘악의 평범성’이라 불렀다. 즉, 악은 반드시 사악한 의도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에 대해 성찰하지 않고, 주어진 명령과 규칙에 무비판적으로 복종하는 평범한 사람에 의해서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 것의 위험
아렌트가 본 아이히만은 철학적 성찰이나 도덕적 판단을 결여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단순히 ‘명령을 따른 것’으로 정당화했고, 피해자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무감각했다. 아렌트는 이러한 태도가 악을 가능하게 한다고 보았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타인의 입장에서 상황을 상상하거나, 도덕적 책임을 자각할 수 없기 때문에, 체제의 비인간적인 명령을 그대로 수행하게 된다. 따라서 ‘사유’의 부재가 악의 토양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렌트의 경고였다.
악의 평범성이 주는 교훈
악의 평범성 개념은 전체주의 사회뿐만 아니라,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도 깊은 시사점을 준다. 기업, 정부, 군대, 학교 등 어떤 조직에서도 개인이 명령에 무비판적으로 따를 때, 부당한 결정과 비윤리적 행위가 쉽게 발생할 수 있다. 특히 관료주의적 시스템은 책임을 분산시켜, 개인이 자신의 역할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회피하게 만든다. 아렌트는 이러한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판단력’과 ‘비판적 사고’라고 강조했다. 즉, 법이나 규칙을 따르더라도, 그것이 인간성을 훼손하는지 여부를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의 적용
오늘날 악의 평범성 개념은 직장 내 부당한 관행, 정치적 부패, 군사적 명령 수행, 온라인 혐오 발언 등 다양한 맥락에서 적용될 수 있다. 우리는 종종 ‘다들 하니까’ 또는 ‘규정이니까’라는 이유로 행동하지만, 그 결과가 타인의 권리와 존엄을 침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아렌트의 경고는 이러한 일상적 상황에서조차 도덕적 성찰과 용기를 발휘해야 함을 상기시킨다. 악은 괴물 같은 존재만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의 손을 통해서도 구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