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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책에는 페이지가 생겼을까

by simplelifehub 2026. 1. 13.

책을 펼치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페이지다. 앞과 뒤로 넘길 수 있는 종이의 묶음은 읽기의 기본 단위가 되었고, 우리는 페이지 번호를 기준으로 위치를 기억하고 내용을 인용한다. 이 구조는 너무 익숙해서 책은 원래 페이지로 구성된 물건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글을 담는 매체가 반드시 페이지라는 형식을 가져야 할 이유는 없다. 실제로 역사 속에는 페이지가 없는 책, 혹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읽히는 기록물도 존재해 왔다. 그렇다면 왜 책에는 결국 페이지가 생기게 되었을까. 이 글에서는 페이지라는 형식이 어떻게 선택되고 고정되었는지를 일상 사물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살펴본다.

글은 오랫동안 펼쳐진 면 위에 존재했다

초기의 기록물은 페이지 개념과 거리가 멀었다. 글은 돌이나 점토판, 두루마리처럼 연속된 표면 위에 적혔고, 읽기는 앞에서 뒤로 이어지는 흐름을 따라 이루어졌다. 이때 중요한 것은 글의 순서였지, 위치를 나누는 단위는 아니었다. 두루마리 형태의 기록물에서는 글을 찾기 위해 전체를 펼쳐야 했고, 특정 지점을 빠르게 오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읽기는 연속적인 경험이었고, 기록물은 하나의 긴 면으로 인식되었다. 이 방식은 서사적 읽기에는 적합했지만, 참고와 비교에는 불리했다. 특정 내용을 다시 찾거나, 여러 부분을 오가며 읽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글은 흐름이었지만, 관리하기 쉬운 구조는 아니었다. 즉 초기의 기록물에서 글은 이어져 있었지만, 잘게 나뉘어 있지는 않았다.

페이지는 글을 관리 가능한 단위로 바꾸었다

페이지가 등장한 배경에는 글의 사용 방식 변화가 있었다. 글은 단순히 읽히는 대상에서, 보관되고 참조되는 자산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글을 나누는 기준이 필요해졌다. 페이지는 글을 일정한 크기의 단위로 나누었다. 이는 물리적인 편의뿐만 아니라,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글은 더 이상 끝없이 이어지는 흐름이 아니라, 넘길 수 있고 되돌아갈 수 있는 조각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또한 페이지는 위치를 지정할 수 있게 했다. 몇 번째 페이지라는 표현은 글의 좌표를 만들어 주었고, 이는 인용과 토론, 교육에 매우 유용했다. 글은 기억에만 의존하지 않고, 정확한 위치로 호출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페이지는 단순한 종이 조각이 아니라, 지식을 정렬하는 도구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페이지는 읽는 방식과 사고의 구조를 바꾸었다

페이지가 표준이 되면서 읽기의 방식도 달라졌다. 독자는 더 이상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아도 되었고, 필요한 부분을 골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읽기는 연속적 경험에서 선택적 탐색으로 확장되었다. 페이지는 사고의 리듬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 페이지는 하나의 생각 단위처럼 인식되었고, 글은 페이지 단위로 끊어 읽히며 이해되었다. 이는 생각을 정리하고 요약하는 방식에도 변화를 주었다. 또한 페이지는 책의 구조를 시각화했다. 두께와 분량은 지식의 양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었고, 페이지를 넘기는 행위는 진도의 감각을 만들어냈다. 독자는 자신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손으로 느낄 수 있었다. 결국 페이지는 글을 더 잘 읽기 위해 만들어진 형식이었지만, 동시에 글을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어 놓았다. 페이지는 내용을 담는 틀이자, 사고를 배열하는 틀이 되었다. 우리가 책을 페이지 단위로 읽고 기억하는 이유는, 그 형식이 가장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페이지는 자연의 요구가 아니라, 지식을 다루기 위해 선택된 인간의 발명이었다. 책에 페이지가 생긴 순간부터, 글은 흐름이 아니라 구조를 갖게 되었고, 읽기는 경험에서 관리로 확장되었다. 우리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그 동작은 오랜 시간 동안 굳어온 읽기의 방식이 조용히 작동하는 순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