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황허 문명의 형성과정에서 가장 논쟁적인 주제는 전통 사서에 기록된 ‘하(夏) 왕조’가 실제로 존재했는지 여부이다. 이러한 논쟁의 중심에 있는 유적이 바로 허난성 서부 지역에서 발견된 ‘얼리터우(二里頭) 유적’이다. 얼리터우는 기원전 1900~1500년경 번영한 청동기 시대 초기 도시로, 중국 고고학에서 최초의 국가급 도시로 평가받는다. 궁전 터, 청동기 제작 공방, 도로망, 계층적 매장지 등은 단순한 씨족 사회를 넘어선 복합 사회가 이미 출현했음을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얼리터우 유적의 도시 구조와 기술 수준, 사회 조직력, 그리고 하 왕조 실재 여부를 둘러싼 고고학적 논쟁을 심층적으로 살펴본다.
얼리터우 유적의 도시 구조와 기술적 성취
얼리터우 유적은 구조적 복잡성과 규모 면에서 중국 최초의 ‘도시’로 평가된다. 유적지 중심에는 직사각형 형태의 대형 궁전 건축군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는 목조 기반 위에 흙과 석재가 결합된 구조로 지어졌다. 궁전의 배치는 동서축을 기준으로 정교하게 정렬되어 있어, 당시 사회가 이미 계획도시 개념을 이해하고 실행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궁전 유적은 4기(期)에 걸쳐 확장되었으며, 3기와 4기에서는 대규모 전각이 여러 동으로 구성된 복합 건축 체계가 확인되었다. 이는 정치 권력이 점차 집중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며, 국가 형성 과정의 초기 단계를 고고학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궁전 외곽에는 일정한 폭을 유지한 도로망이 구축되어 있으며, 이는 중앙권력이 도로를 통해 도시 전체를 계획적으로 통제했음을 시사한다. 청동기 제작 기술은 얼리터우 문명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유적에서 출토된 비파형 도끼, 제사용 도구, 장식품 등은 정교한 주조 기술을 보여주며, 금속 공예가 정치·종교적 권위를 상징하는 역할을 했음을 나타낸다. 주조 과정에 사용된 점토 주형과 주조구, 작업장 흔적은 당대 청동 기술이 전문화된 공방 체계를 통해 운영되었음을 밝혀준다.
특히, ‘얼리터우 청동물소’로 불리는 장식적 청동기와 옥기, 대형 토기들은 당시 지배층의 위상을 상징하는 부장품으로 해석되며, 계층 분화가 이미 상당히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 농경 공동체가 아니라 정치·경제·종교가 통합된 초기 국가가 형성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사회 조직력과 초기 국가 체제의 발전
얼리터우 유적은 도시 구조뿐 아니라 사회 조직력의 측면에서도 초기 국가의 존재를 강하게 시사한다. 가장 중요한 근거는 대규모 노동력이 동원된 건축 공사이다. 궁전·도로·작업장의 규모는 여러 공동체를 통합해 조직적인 노동을 수행할 수 있는 권력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족장 사회가 아니라 중앙집권적 정치 권력이 형성되기 시작한 단계로 볼 수 있다.
무덤 구조에서도 사회적 계층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일부 무덤에서는 청동기·옥기·장식품 등 고급 부장품이 대량으로 발견되는 반면, 일반인의 무덤은 부장품이 거의 없거나 단순한 토기만 포함되어 있다. 이는 사회적 역할과 계급이 분명히 구분된 계층 사회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얼리터우에서는 대규모 제사시설과 의례용 유물이 다수 확인되었다. 이는 종교가 정치 권력을 정당화하는 핵심 체제로 기능했음을 의미한다. 지배층은 조상 숭배와 제사의 주도권을 통해 권력을 강화했으며, 궁전 내에서 이루어진 의례는 공동체 통합과 정치적 상징성을 갖추고 있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얼리터우는 농경 중심 사회를 넘어 채집·수렵·수공업·금속 제작·옥기 가공 등 다양한 산업 활동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이는 도시 경제가 이미 복합화되었고, 노동 분업이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특히 도로망과 저장 시설은 물자 관리가 체계적이었음을 보여주며, 이는 초기 관료제의 존재를 추정케 한다.
하 왕조 실재 여부와 고고학적 논쟁
얼리터우 유적이 가장 큰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바로 ‘하 왕조’의 실재 여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국 전통 사서인 《사기》와 《죽서기년》은 하 왕조가 중국 최초의 왕조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고고학적 증거 부족으로 인해 오랫동안 신화적 왕조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얼리터우 유적이 발굴되면서 학계는 이 유적을 하 왕조와 연결할 수 있는지 여부를 두고 활발한 논쟁을 벌였다.
‘하-상-주 단대 공정’ 이후 중국 학계에서는 얼리터우를 하 왕조의 수도 혹은 정치 중심지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해졌으나, 국제 학계에서는 신중한 입장이 유지되고 있다. 그 이유는 얼리터우에서 아직까지 문자 기록(예: 갑골문 같은 직접적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문자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 단순히 연대와 유물 수준만으로 하 왕조와 동일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그러나 얼리터우 유적의 정치·경제·종교적 구조는 전통 기록 속 ‘하’의 모습과 상당히 부합한다. 특히 정교한 궁전 배치, 청동기 제작, 대규모 노동력 조직은 초기 국가를 설명하는 핵심 기반을 충족하며, 이는 신화적 존재로 알려진 하 왕조가 실제로 존재했을 가능성을 높인다.
한편, 일부 학자는 얼리터우가 ‘하 왕조’가 아니라 지역적 초기 국가 또는 ‘연속적 문명 단계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얼리터우는 하 왕조의 직접적 근거는 아니지만 중국 문명의 국가 형성이 이루어진 주요 전환점이라는 점에서 문명사적 의미를 지닌다.
현대 고고학 연구는 지층 분석, 탄소연대 측정, 재료학 연구 등을 활용해 얼리터우의 연대·구조·사회 체계를 더욱 정밀하게 규명하고 있으며, 앞으로 문자 자료 또는 새로운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된다면 하 왕조 실재 논쟁은 중요한 전환점을 맞을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