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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독립 전쟁 - 오스만의 몰락과 신생 공화국의 탄생

by simplelifehub 2025. 12. 2.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혼란과 세브르 조약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과 함께 참전하여 패전국이 되었고, 그 결과 제국의 해체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1920년 8월, 연합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체결된 세브르 조약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분할하며 제국을 사실상 무력화시켰다. 이 조약에 따라 아나톨리아 대부분이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의 점령 하에 들어갔고, 그리스는 스미르나(이스미르)를 비롯한 서부 아나톨리아까지 군사적으로 점령했다. 또한 아르메니아와 쿠르디스탄의 독립 국가 설립도 예정되어 있었기에 오스만 제국의 주권은 크게 훼손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약에 대해 터키 국민들과 군부는 강한 반발을 보였다. 특히 무스타파 케말 파샤(후일 아타튀르크)는 이를 터키 민족의 말살로 간주하고, 1919년 5월 삼순에 상륙하여 민족 저항운동을 시작한다. 그는 곧 앙카라에 터키 대국민의회를 수립하고, 오스만 정부와 단절된 독립운동의 중심을 형성한다. 그의 지도 아래 민병대와 탈영병이 규합되어 점점 조직적인 군사세력으로 발전하게 되며, 이는 단순한 반란 수준을 넘어 터키의 미래를 건 내전으로 이어진다.

그리스-터키 전쟁과 앙카라 정부의 반격

1920년대 초, 가장 큰 위협은 스미르나를 점령하고 중앙 아나톨리아로 진격해오던 그리스군이었다. 그리스는 메갈리 이데아(위대한 이상)라는 범그리스주의 목표 아래, 오스만 제국의 옛 영토를 탈환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그리스군은 스미르나에서 출발해 앙카라를 향해 진격하며 본격적인 그리스-터키 전쟁이 발발했다. 앙카라 정부는 이에 맞서 국민군을 조직해 방어에 나섰다. 특히 1921년의 사카리아 전투는 터키 독립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다. 무스타파 케말이 직접 지휘한 이 전투에서 터키군은 장기적인 방어전을 통해 그리스군의 진격을 저지했고, 이후 반격을 통해 점차 서진해 나간다. 1922년 8월에는 대결정전이라 불리는 두무룹나르 전투에서 그리스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며 전세를 완전히 뒤집었다. 이후 터키군은 스미르나를 탈환하고, 그리스군은 해안에서 철수한다. 이 과정에서 스미르나 대화재가 발생하고, 다수의 그리스 및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 학살 혹은 추방되는 비극도 함께 일어났다. 이러한 민족 간 충돌은 독립 전쟁의 또 다른 그림자였으며, 이후 터키 공화국의 민족적 동질성을 강화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로잔 조약과 터키 공화국의 수립

1923년 7월, 앙카라 정부는 연합국과 로잔 조약을 체결하며 국제적으로 터키의 주권을 인정받는다. 이 조약은 세브르 조약을 공식 폐기하고, 현재의 터키 영토를 확정하는 중요한 국제 협정이었다. 또한 조약의 일환으로 터키와 그리스 간의 인구 교환이 실시되어 약 150만 명의 그리스계 주민과 50만 명의 무슬림 터키계 주민이 상호 이주하게 된다. 이 조치는 당시로서는 민족 갈등의 해결책으로 여겨졌지만,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엄청난 고통과 상실을 야기했다. 로잔 조약 체결 이후, 무스타파 케말은 1923년 10월 29일 터키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자신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이후 아타튀르크로 불리게 된 그는 세속주의와 근대화를 핵심으로 한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술탄제가 공식 폐지되고, 셰이흐울이슬람과 칼리파 제도도 제거되며, 터키는 종교가 아닌 민족 중심의 현대 국가로 탈바꿈한다. 터키 독립 전쟁은 단순한 외세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낡은 제국주의 질서와의 단절이자 새로운 민족국가로의 전환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오스만의 붕괴는 많은 이들에게 상실이었지만, 그 폐허 위에 터키 공화국이 세워지며 중동과 유럽 사이에서 독자적이고 현대적인 국가 모델을 제시한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