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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 흑해의 지배권을 둘러싼 러시아-오스만 제국 전쟁

by simplelifehub 2025. 11. 23.

러시아 제국의 팽창과 오스만 제국과의 전략적 충돌 배경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이어진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 간의 일련의 전쟁은 유럽과 아시아의 지정학적 균형을 결정짓는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 이래 흑해와 발칸 반도 진출을 통한 남하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고, 이는 당시 동유럽과 중동을 지배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의 이해관계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특히 흑해는 군사적, 상업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러시아는 흑해를 통해 지중해로 진출하고자 하는 염원을 가지고 있었다.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몰다비아 지역의 지배를 확대하고, 흑해 연안의 요새를 정비하며 해군력을 강화해 나갔다. 반면, 오스만 제국은 이미 내부의 이권 다툼과 군사력 약화로 인해 방어에 급급한 상황이었으며, 러시아의 지속적인 침공에 점점 밀려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768년부터 1774년까지 이어진 제1차 러시아-오스만 전쟁은 단순한 국경 분쟁을 넘어서 흑해의 지배권을 둘러싼 본격적인 세력 다툼으로 발전했다. 이 전쟁은 유럽의 다른 열강들에게도 중요한 관심사로 떠올랐으며,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영국, 프랑스 등은 각자의 이해에 따라 러시아와 오스만의 균형을 주시하며 개입 여부를 저울질하게 된다. 결국 이 전쟁의 흐름은 단순한 양국 간의 문제를 넘어 유럽 전체의 세력 구도에 영향을 미치는 국제적 분쟁으로 확대되었다.

쿡카인 전투와 카인즈 전투의 승리, 그리고 퀴추크 카이나르자 조약의 굴욕

1768년 개전 이후 러시아는 전반적으로 우세한 전황을 이어갔고, 1770년 쿡카인 전투와 카인즈 전투에서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러시아군은 발트해 함대를 지중해로 우회시켜 오스만 해군을 압도하였으며, 육상에서는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지방을 점령하고 오스만의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특히 카인즈 전투에서는 러시아의 명장 수보로프가 이끄는 정예군이 오스만군을 괴멸시키면서 러시아의 전쟁 주도권이 확고해졌다. 이에 따라 1774년 체결된 퀴추크 카이나르자 조약은 오스만 제국에게 큰 굴욕을 안기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 조약을 통해 러시아는 크림 칸국의 독립을 승인받는 형식으로 실질적인 영향력을 확보했으며, 흑해 연안 항구들의 항행 권리와 오스만 제국 내 그리스 정교도의 보호권도 부여받았다. 이는 러시아가 단순한 군사적 승리를 넘어 오스만 제국 내부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명분까지 획득했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더 나아가 흑해를 거점으로 한 러시아 해군의 지중해 진출이 가능해졌고, 이는 이후 오스만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영국 등 다른 열강과의 충돌로 이어지는 시발점이 된다. 이처럼 퀴추크 카이나르자 조약은 단지 한 전쟁의 종결이 아니라, 러시아 제국이 유럽 및 중동 세계에서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전환점으로 기능하였으며, 오스만 제국의 점진적 쇠퇴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자리매김했다.

흑해 지배권 확립과 동유럽 패권 구조의 변화

퀴추크 카이나르자 조약 이후에도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갈등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으며, 이후에도 1787년~1792년 전쟁과 1806년~1812년 전쟁 등 반복되는 충돌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크림 반도를 공식적으로 병합하고, 흑해 연안에 군사 기지를 확대함으로써 실질적인 해상 지배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등 발칸 반도 북부 지역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였으며, 이들 지역은 점차 오스만 제국의 통제에서 벗어나 러시아의 위성국가로 변모해 갔다. 이러한 변화는 동유럽 전체의 패권 구조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오스트리아 제국과 프로이센 등 다른 열강들 역시 발칸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경쟁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발칸 반도는 이후 19세기와 20세기 초까지 '유럽의 화약고'로 불릴 만큼 민족, 종교, 외세의 이해관계가 얽힌 복잡한 지역으로 변모하게 된다. 한편, 오스만 제국은 계속되는 패배와 내분으로 인해 점점 국력을 상실해갔으며, 이는 19세기 후반 '동방 문제'로 명명된 국제 분쟁의 출발점이 되었다. 러시아는 자신이 정교회 신도의 수호자로서 역할을 자처하며 발칸 민족의 독립을 명분으로 삼았고, 이는 향후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의 민족주의 운동과도 연결되며 러시아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도구가 되었다. 결국 러시아-오스만 전쟁은 단순한 양국의 경쟁을 넘어, 유럽 국제 질서의 재편을 이끈 핵심 사건으로서 전쟁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근대 국제정치의 복잡성을 드러내는 전형적인 사례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