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전쟁사 - 걸프 전쟁과 현대전의 시작

by simplelifehub 2025. 11. 22.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과 국제사회의 대응

1990년 8월 2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은 기습적으로 쿠웨이트를 침공하며 걸프 전쟁의 불씨를 지폈다. 후세인은 쿠웨이트가 석유 생산량을 과도하게 늘려 석유 가격을 하락시키고, 이는 이라크의 경제 회복을 저해한다고 주장하며 무력 침공의 명분을 세웠다. 실제로 이라크는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심각한 부채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었고, 쿠웨이트를 자국의 19번째 주로 병합함으로써 석유 자원을 확보하고 중동 지역에서의 패권을 강화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이에 따라 국제 사회는 강력한 대응에 나섰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결성되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라크에 철군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라크는 이를 무시하고 점령을 지속했으며, 전쟁은 불가피하게 현실로 다가오게 된다. 쿠웨이트 침공은 단순한 국지 분쟁이 아닌 중동 석유 자원과 세계 에너지 안보를 둘러싼 국제 질서의 충돌로 해석되며,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걸프 전쟁은 이처럼 새로운 형태의 국제 공조, 명확한 명분 아래에서의 개입이라는 점에서 과거의 전쟁과는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사막의 폭풍 작전과 기술 중심의 현대전

1991년 1월, ‘사막의 폭풍 작전(Operation Desert Storm)’이 개시되며 연합군은 본격적인 대이라크 공세에 들어갔다. 이 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다국적 군사 작전으로, 미국을 포함한 35개국의 병력이 참여했다. 작전 초기에는 정밀 유도 미사일과 스텔스 전투기, 위성 정찰 등 최신 기술이 총동원된 공습이 이뤄졌으며, 이는 이라크 군의 방공망과 통신 체계를 빠르게 마비시켰다. 연합군은 실시간 위성 영상을 기반으로 타격 목표를 설정하고, GPS를 활용한 정밀 타격으로 이라크 군의 주요 거점들을 효과적으로 파괴했다. 공중 폭격이 5주간 지속된 후, 지상군이 투입되었고 불과 100시간 만에 쿠웨이트를 해방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연합군의 피해는 최소화되었고, 이라크 군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으며 전선에서 급속히 후퇴했다. 걸프 전쟁은 전통적인 대규모 병력 충돌보다는 기술, 정보, 정밀 무기가 주도한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현대전의 서막’이라 평가받는다. 특히 CNN 등을 통한 생중계는 전쟁의 모습이 전 세계로 실시간 전파되며 미디어와 전쟁의 결합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전쟁 이후의 중동 정세와 걸프 전쟁의 유산

쿠웨이트 해방 이후 이라크는 유엔의 강력한 제재 아래 놓였으며, 사담 후세인 정권은 점차 고립되었다. 전쟁은 명확한 승자와 패자가 있었지만, 중동 지역의 긴장과 불안정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특히 후속적으로 이어진 유엔의 무기 사찰과 이라크 내 반정부 세력의 탄압, 그리고 미국과 이라크 간 지속적인 갈등은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이어지는 복선을 형성하게 된다. 걸프 전쟁은 군사 기술의 진보뿐만 아니라, 국제법과 유엔의 역할, 전쟁의 정당성과 개입의 기준 등 다양한 논쟁을 촉발하였다. 한편 전쟁 이후 재건된 쿠웨이트는 석유 생산과 경제를 빠르게 정상화하며 안정세를 되찾았으나, 이라크는 오랜 경제 제재와 정치적 혼란 속에서 국민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걸프 전쟁은 오늘날에도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되며, 21세기 전쟁의 새로운 양식을 규정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전통적인 전쟁이 병력과 무력 중심이었다면, 걸프 전쟁 이후의 분쟁은 정보전, 심리전, 미디어전, 그리고 국제정치의 연계성이 더욱 강조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따라서 이 전쟁은 단순한 무력 충돌을 넘어, 전후 국제 질서에 깊은 흔적을 남긴 사건으로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