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 전선의 분수령이 된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발발 배경
1942년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소련과의 전쟁이 장기화되자, 전략적으로 중요한 곡물과 석유 자원을 확보하고 동부 전선에서의 주도권을 다시 쥐기 위해 스탈린그라드 점령을 목표로 삼았다. 이 도시는 정치적으로 ‘스탈린’의 이름이 붙은 상징적 의미 외에도, 볼가강을 따라 펼쳐진 물류의 요충지였으며, 우랄산맥을 통한 산업 물자 수송로이자 석유 자원지인 캅카스 지역으로 진출하는 교두보였다. 히틀러는 이 도시의 점령이 소련의 사기를 꺾고 독일의 전략적 우위를 회복시켜 줄 것이라 확신하였다. 이에 따라 제6군을 주축으로 한 독일군은 1942년 여름 스탈린그라드 공격을 본격화하였고, 소련도 총력전을 선언하며 이 도시에 전력을 투입했다. 이 전투는 기존의 속도전에서 벗어나, 도시 안의 모든 건물 하나하나를 둘러싼 밀착 전투로 전개되었고, 세계 전사상 가장 치열하고 잔혹한 시가전 중 하나로 기록되게 된다.
도시를 중심으로 벌어진 참호 없는 시가전과 전략적 역포위의 성공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전통적인 대규모 기갑전이나 전선 돌파가 아닌, 건물과 거리 하나하나를 차지하기 위한 시가전의 극단적 양상을 띠었다. 독일군은 항공 폭격과 포격으로 도시를 초토화시키며 진격했지만, 무너진 건물 속에 숨어 있던 소련군은 교묘한 저항을 펼쳤고, 저격수와 소규모 유격 전술로 독일군의 진입을 저지했다. 특히 바실리 자이체프와 같은 저격수의 활약은 소련 병사들의 사기를 고양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전투가 장기화되면서 양측 모두 막대한 병력과 자원을 소모했으며, 특히 혹한이 시작되자 보급이 끊긴 독일군의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런 가운데 소련군은 치밀한 반격 작전인 ‘우라노스 작전’을 발동해 독일군의 측면을 공략했고, 루마니아·이탈리아 등 동맹국 병력의 약한 방어선을 돌파하여 제6군을 도시 안에서 완전히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이 역포위는 독일군에게 치명적 타격을 안겼고, 히틀러의 ‘절대 항복 금지’ 명령 속에서 수십만 병력이 도시 안에서 고립되었다.
전세 전환의 결정적 전투로 남은 스탈린그라드의 역사적 의의
1943년 2월, 독일 제6군의 총사령관 파울루스는 결국 항복을 선언하고 소련군에 투항함으로써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소련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이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독일군은 이 전투에서 약 30만 명의 병력을 잃었고, 연합국은 나치 독일이 더 이상 전선 전체를 통제할 수 없다는 신호로 해석했다. 스탈린그라드는 단지 하나의 도시 전투가 아닌, 전 세계가 주목한 상징적 대결이었고, 소련은 이 승리를 통해 국내외적으로 정치적 정당성과 군사력을 과시할 수 있었다. 나아가 이는 연합국의 대독 협력 강화, 제2전선 개척 논의, 그리고 전후 소련의 발언권 강화로까지 이어졌다. 전투의 상흔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 있으며, 스탈린그라드는 볼고그라드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러시아 국민에게는 국가 방어의 상징이자 영웅주의의 기념물로 남아 있다. 현대 전쟁사에서도 이 전투는 시가전의 교과서로 자주 인용되며, 강대국 간 전쟁에서 물류, 사기, 보급, 심리전 등 복합 요소들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