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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 갈리폴리 전역이 남긴 전략 실패의 교훈

by simplelifehub 2025. 11. 18.

대영제국의 오스만 제국 침공 계획과 전쟁 초기의 배경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의 초반, 연합국은 서부 전선의 교착 상태를 타개하고 동부 전선에서 고전 중인 러시아 제국을 지원하기 위한 방안으로 오스만 제국을 압박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때 제안된 전략이 바로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한 공세였고, 그 목표는 해협을 확보해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을 위협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을 전쟁에서 이탈시키는 것이었다. 이 작전은 영국 해군 장관 윈스턴 처칠의 주도로 기획되었으며, 연합국은 해군 중심의 작전이 충분히 성공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초기 해상 공격이 오스만 제국의 지뢰와 포격에 의해 실패하자, 육상 병력을 투입하는 대규모 상륙 작전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영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ANZAC) 등의 병력이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하게 되며, 갈리폴리 전역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상륙작전의 난관과 참혹했던 전투의 실상

1915년 4월 25일, 연합군은 갈리폴리 반도의 여러 해변에 동시다발적으로 상륙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지형에 대한 오판, 해안 절벽 위를 장악한 오스만 군의 효과적인 방어, 해군의 지원 부족 등이 겹쳐 연합군은 상륙 직후부터 치열한 저항에 부딪혔다. 특히 ANZAC 병력이 투입된 안작 코브 해변에서는 험준한 지형과 교차사격이 가능한 방어 진지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으며, 초반에 목표한 고지들을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 전선은 금세 교착 상태에 빠졌고, 전투는 참호전 양상으로 바뀌었다. 여름이 되자 식수 부족과 전염병, 극심한 더위 속의 생활이 병사들을 괴롭혔고, 오스만 군 역시 지독한 조건에서 싸움을 이어갔다. 특히 오스만 제국의 케말 아타튀르크 장군은 병사들에게 "나는 너희에게 죽음을 명령한다"고 말하며 강력한 저항을 이끌었고, 이는 결국 연합군의 돌파 시도를 좌절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연합군은 병력을 보강하여 몇 차례 대규모 공세를 감행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전투가 장기화되자 사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작전은 갈수록 수렁에 빠졌다.

작전의 철수와 전쟁사에 남은 전략적 반성

1915년 말, 연합군은 작전이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철수를 결정하게 된다. 1916년 초에 걸쳐 연합군은 매우 조심스럽게 철수를 단행했고, 아이러니하게도 작전 전체에서 가장 성공적인 부분은 바로 이 철수 과정이었다. 8개월간의 갈리폴리 전역은 연합군에게 25만 명 이상의 사상자, 오스만 제국에게도 비슷한 규모의 피해를 안기며 막을 내렸다. 이 전역은 전술적 오류와 정보 부족, 지나친 낙관주의, 지휘 체계의 혼란 등 군사 작전이 실패할 수 있는 요소들이 모두 집약된 사례로 남았다. 반면, 오스만 제국은 이 승리를 통해 전쟁 참여의 정당성과 국민 결속을 강화할 수 있었으며,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낸 무스타파 케말은 훗날 터키 공화국의 창립자로 성장하게 된다. 또한 ANZAC 병사들의 용기와 희생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국민 정체성의 중요한 상징이 되었고, 매년 4월 25일은 ‘안작 데이(ANZAC Day)’로 기념되고 있다. 갈리폴리 전역은 단지 전쟁사적인 실패의 교훈일 뿐만 아니라, 현대 국민국가 정체성 형성과 역사 기억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도 갈리폴리의 전장을 찾는 발걸음은 끊이지 않으며,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새기는 역사적 현장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