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유럽을 지배한 나폴레옹의 야망이 겨냥한 마지막 상대
1812년 나폴레옹은 유럽 대부분을 자신의 지배 하에 두고 있었으나, 러시아 제국만은 그의 대륙봉쇄령을 거부하며 독자적인 무역 노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나폴레옹에게 심각한 위협으로 여겨졌고, 결국 그는 러시아를 굴복시키기 위해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 중 하나인 6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해 러시아 원정을 감행하게 된다. 이 원정군에는 프랑스 외에도 여러 위성국과 동맹국 병력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는 나폴레옹의 유럽 지배력이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군사적 자만과 확장 욕구가 얼마나 컸는지를 드러낸다. 하지만 러시아의 광활한 대지와 가혹한 겨울, 그리고 예상치 못한 전략적 저항은 그의 계산을 산산이 부수게 된다.
초기에는 순조로웠던 진군이 무너지기 시작한 이유
러시아 원정 초반, 나폴레옹의 대군은 빠르게 진격하며 국경을 넘어 모스크바 방향으로 향했다. 러시아군은 정면 교전을 피하면서 철수했고, 후퇴하면서 모든 마을과 식량을 불태우는 '초토화 전략(Scorched Earth)'을 실행했다. 이 전략은 나폴레옹 군이 현지에서 자급자족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병력 유지에 심각한 차질을 초래했다. 9월에 마침내 모스크바에 도달했을 때, 도시는 이미 주민들이 떠나고 대부분이 불타 폐허가 된 상태였다. 나폴레옹은 차르 알렉산드르 1세가 항복 협상에 나서길 기대했으나, 러시아는 끝까지 버텼고, 그는 모스크바에서 병사들과 함께 추운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다. 병사들은 식량 부족과 혹한에 시달렸고, 사기 저하와 질병, 탈영이 급격히 증가했다. 이러한 요소들은 군대의 전투력 자체를 마비시켜버렸고, 나폴레옹은 철군을 결단할 수밖에 없었다.
비극적인 철군과 러시아 겨울의 잔혹함
모스크바에서의 철수는 그 자체로 또 다른 전투였다. 나폴레옹은 남쪽으로 빠져나가려 했으나, 러시아군은 곳곳에서 기습과 유격전을 펼쳤고, 얼어붙은 도로와 강을 건너야 하는 상황은 병사들의 생존 가능성을 더욱 낮췄다. 특히 베레지나 강 도하 전투는 프랑스군에게 엄청난 타격을 입혔으며, 이 시점에서 군대는 거의 조직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수많은 병사들이 굶주림과 추위, 전투로 목숨을 잃었고, 말과 장비도 대부분 유실되었다. 결국 살아서 프랑스로 돌아간 병력은 원정 출정 당시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이 대참사는 나폴레옹의 군사 경력에 있어 가장 치명적인 패배 중 하나였고, 그의 유럽 지배에 균열이 생기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후 유럽 각국은 프랑스의 패권에 반기를 들었고, 나폴레옹의 몰락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러시아 원정이 전쟁사에 남긴 교훈과 전환점
1812년 러시아 원정은 단지 한 전쟁의 실패에 그치지 않고 전쟁사 전반에 걸쳐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가장 핵심적인 교훈은 ‘병참’과 ‘기후’의 결정적 중요성이다. 아무리 정규군이 강하고 경험이 풍부해도, 수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타국의 광활한 영토에서 유지하려면 보급과 환경 대응 능력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나폴레옹처럼 전략과 전술의 천재로 불리던 인물조차도 자연과 지리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로 인해 이후 유럽 국가들은 기후와 지형을 고려한 전쟁 계획을 수립하는 데 더욱 신중을 기하게 되었다. 또한, 러시아 국민의 저항 의지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였다. 전면전에 나서지 않으면서도 끊임없는 소모전을 펼치고, 국토를 스스로 불태워 침략자의 자원을 끊는 전략은 훗날 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독일군을 상대할 때 다시 등장하게 된다. 이처럼 러시아 원정은 전쟁의 성패가 전투 자체보다도 전략, 자원, 지형, 기후, 민심 등 복합적 요소에 달려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역사적 사례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