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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로티의 신실용주의 - 진리는 대화 속에서 형성된다

by simplelifehub 2025. 8. 3.

리처드 로티는 20세기 후반 미국 철학계를 대표하는 사상가로, 전통 철학의 보편주의적 야망을 해체하고 철학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인물이다. 그는 존 듀이, 윌리엄 제임스, 찰스 퍼스 등 미국 고전 실용주의자들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20세기 언어철학, 해석학, 포스트모더니즘과 접목하여 ‘신실용주의(neo-pragmatism)’라는 독자적 입장을 구축했다. 로티는 진리란 세계와 일치하는 객관적 명제가 아니라, 사회적 대화를 통해 형성되는 일시적 합의라고 본다. 그는 형이상학적 실재나 초월적 진리를 추구하는 전통 철학의 방식이 오히려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와 표현을 억압한다고 비판하며, 철학은 더 이상 진리의 기초를 찾는 것이 아니라, 대화와 상호이해를 증진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 『철학과 자연의 거울』 등 그의 대표 저작은 이러한 철학적 전환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로티는 철학을 ‘문화적 해석자’로 자리매김하고자 했다.

철학은 보편적 진리를 찾는 학문이 아니다

로티는 전통 철학이 지식의 보편적 기초, 예컨대 '이성', '의식', '언어' 등을 통해 진리를 확립하려는 시도에 깊은 회의를 품었다. 그는 이러한 기초주의적 태도가 철학을 종교나 과학과 비슷한 방식의 ‘절대적 해답 제공자’로 만들어버렸다고 본다. 『철학과 자연의 거울』에서 로티는 이러한 전통을 ‘표상주의(representationalism)’로 부르며, 철학이 외부 세계를 정확히 반영해야 한다는 관념이 근대 이후 철학을 지배해왔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표상주의는 언어와 사유의 유동성을 간과하고, 실제로는 억압적인 철학적 권위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한다고 비판한다. 로티는 우리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언어적 틀 속에서 이해한다고 보며, 따라서 진리는 ‘객관적 실재와의 일치’가 아니라 ‘사회적 담론 내에서의 설득력’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진리를 절대적 실체에서 인간의 실천과 대화로 전환시키는 것이며, 철학의 과제는 더 이상 ‘기초 찾기’가 아니라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여는 것’이다.

우연성과 아이러니 - 철학적 겸손의 윤리

로티의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에서 핵심 개념은 바로 ‘우연성(contingency)’이다. 그는 인간의 언어, 자아, 가치, 진리 모두가 역사적이고 우연적인 산물임을 강조하며, 어떠한 것도 절대적인 근거를 가질 수 없다고 본다. 이 관점은 철학자에게 ‘아이러니스트(ironist)’의 태도를 요구한다. 아이러니스트란 자신의 신념과 언어체계를 절대시하지 않고, 언제든 그것이 도전받고 수정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사람이다. 로티는 아이러니스트가 되어야만 타인과의 대화와 연대가 가능하다고 본다. 그는 특히 도덕적 보편성 대신 연민(sympathy)과 상상력(imagination)을 통해 연대를 확장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이는 정치철학의 새로운 윤리적 기반으로 작용한다. 로티에게 중요한 것은 ‘옳은 철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삶의 방식과 언어들이 공존할 수 있는 담론 공간을 여는 것이다. 이는 철학자에게 더 이상 ‘진리의 수호자’가 아니라 ‘대화의 조율자’로서의 역할을 부여하며, 철학을 민주주의적 문화의 일부로 통합하려는 시도로 이해된다.

철학은 대화이고 문화다 - 탈철학 이후의 철학

로티는 철학이 스스로를 과학이나 종교와 동등한 인식체계로 간주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본다. 그는 철학을 ‘문화적 담론의 한 갈래’로 보며, 문학, 역사, 정치, 예술 등 다른 담론과 상호작용하는 열린 공간으로 재정의한다. 로티는 ‘탈철학(post-philosophy)’의 시대가 도래했으며, 이제 철학은 다른 담론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의미를 생성해 나가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철학을 하나의 삶의 방식, 대화의 윤리로 전환시키는 입장이며, 실용주의적 전통과 해석학, 포스트구조주의를 통합한 독창적 시도다. 로티는 철학자가 특정한 ‘진리 체계’를 제시하기보다는, 사회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다양한 관점이 충돌하며 상호 이해에 이를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그의 철학은 전통적인 인식론이나 존재론적 논의를 넘어서, 철학의 존재 이유 자체를 다시 묻는 사유이자,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회를 위한 문화적 실천으로 자리매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