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심장부를 위협한 오스만 제국의 두 번째 도전
1683년, 오스만 제국은 유럽 정복의 야망을 안고 두 번째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Vienna)을 포위하였다. 이는 1529년 첫 번째 포위 실패 이후 약 150여 년 만의 재도전이었으며,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술탄 메흐메트 4세와 대재상 카라 무스타파가 주도하였다. 당시 오스만 군은 15만 명 이상의 대군을 동원하여 빈 성을 둘러쌌고, 이는 단순한 도시 점령을 넘어 유럽 기독교 세계의 중심부를 무너뜨리겠다는 전략적 야망이 담긴 시도였다. 빈이 함락된다면, 오스만 제국은 중앙유럽으로의 통로를 열고 독일 지역과 발칸 전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전투는 단순한 오스만-합스부르크 간의 대결이 아니라, 기독교 유럽 전체가 이슬람의 팽창에 대응한 전방위적 방어전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신성동맹의 결성과 얀 소비에스키의 전격적인 기습
오스만의 진격에 위기를 느낀 유럽은 종교적, 정치적 갈등을 잠시 접고 연합 전선을 구축하였다. 특히 폴란드 왕국의 얀 소비에스키 3세는 유럽 방어의 최전선에 나섰고, 교황 인노첸시오 11세의 중재 아래 신성동맹이 결성되었다. 합스부르크 군과 독일 제후국, 그리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까지 포함된 이 연합군은 약 7만 명의 병력을 모아 빈 해방 작전을 준비하였다. 9월 12일, 소비에스키 왕이 이끄는 폴란드 기병대, 특히 전설적인 ‘기병귀족’이라 불리는 후사르(Hussars)는 카렌베르크 언덕을 넘으며 오스만 진영을 기습 공격하였다. 이 기병 돌격은 유럽 전쟁사에서 가장 대담하고 효과적인 충격전술로 평가되며, 오스만군은 급격히 무너져 대혼란에 빠졌다. 특히 오스만 군의 통신과 보급선이 붕괴되면서 전열이 와해되었고, 카라 무스타파는 빈을 점령하지 못한 채 철수하게 된다. 이후 그는 이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술탄의 명령에 따라 처형당하였다.
빈 전투가 가져온 지정학적 변화와 오스만 제국의 쇠퇴
1683년 빈 전투의 패배는 단지 전투 하나의 결과에 그치지 않았다. 이는 오스만 제국의 유럽 팽창이 사실상 정점에 도달했음을 의미하며, 이후 유럽 내에서의 세력 확장이 점차 축소되는 분수령이 되었다. 빈 전투는 향후 오스트리아-오스만 전쟁(1683~1699)으로 이어졌으며, 이 전쟁의 종결인 카를로비츠 조약을 통해 오스만은 대규모 영토를 상실하게 된다.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 일부가 합스부르크로 넘어가고, 오스만의 군사적 위신은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추락하였다. 한편, 기독교 유럽은 이 승리를 통해 자신감을 회복하고, 이후 18세기 제국주의적 팽창의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폴란드의 소비에스키 왕은 빈의 구원자로 칭송받으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빈 시내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다. 이 전투는 유럽의 역사와 문명이 근본적으로 재정렬되는 계기를 제공하였으며, 오늘날에도 유럽 방어의 상징적 순간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