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시작된 청과 일본의 이해 충돌
19세기 후반 조선은 내부적으로는 세도 정치와 농민 봉기의 혼란 속에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청나라와 일본, 러시아 등 열강의 세력 다툼에 휘말리고 있었다. 특히 1894년 동학 농민운동은 조선 조정이 청나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일본이 조선 문제에 개입할 명분을 얻게 해주었다. 청나라는 기존의 속국 질서를 유지하고자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고, 일본은 이를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 강화로 간주하며 반발하였다. 이에 일본 역시 조선에 군대를 보내고 경복궁을 기습 점령하면서 사실상 내정 장악에 나섰고, 이로 인해 1894년 7월 양국은 정식으로 전쟁에 돌입하였다. 전쟁의 시작은 조선의 영토를 두고 벌어진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동아시아 패권을 둘러싼 청과 일본의 충돌이었다.
일본의 압도적 승리와 청나라 체제의 붕괴
청일전쟁은 초기부터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일본은 근대적인 군사제도와 무기 체계를 바탕으로 청의 낡은 군대를 압도했다. 평양 전투에서 청군이 패퇴하고 이어진 황해 해전에서 북양함대가 궤멸되면서, 청의 주력 부대는 전열을 유지하지 못했다. 이후 일본은 요동반도와 여순, 대련을 점령하며 청의 영토로 진격했고, 1895년에는 산둥반도 일대까지 진출하였다. 반면 청나라 내부는 이미 아편전쟁 이후 계속된 쇠퇴기에 있었고, 부패한 관료체제와 낙후된 군사력으로 인해 효율적인 대응이 불가능했다. 결국 1895년 4월, 청은 일본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며 패배를 공식화하였고,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고 대만과 펑후제도, 요동반도를 일본에 할양하게 되었다. 이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대전환을 의미했다.
조선에 미친 영향과 동아시아 정세의 변화
청일전쟁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을 넘어 조선의 운명을 바꾸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조선은 명목상 독립을 얻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내정 간섭과 압박이 강화되는 결과를 맞게 되었다. 일본은 이후 단발령,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 조선의 정치를 장악하는 방향으로 움직였으며, 이는 대한제국의 출범과 결국 한일병합으로 이어지는 식민 지배의 길로 조선을 끌고 갔다. 또한 이 전쟁은 동아시아에서 청나라의 몰락과 일본의 부상을 상징하며, 이후 러일전쟁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패권 경쟁의 서막을 열었다. 청은 이 패배를 계기로 자강운동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내부적으로는 신해혁명의 불씨를 제공하여 결국 청조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청일전쟁은 단지 두 나라 사이의 충돌이 아닌, 아시아 전체의 국제질서를 재편한 역사적 분수령이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유산은 동북아시아 정치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