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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 무관심 속의 참극, 나미비아 헤레로족 학살

by simplelifehub 2025. 11. 8.

독일 제국주의의 아프리카 진출과 갈등의 배경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유럽 열강들은 아프리카 대륙을 식민지로 삼기 위한 경쟁에 뛰어들었다. 독일 제국 역시 비교적 늦게 제국주의 경쟁에 참여했지만, 1884년 베를린 회의 이후 남서아프리카 지역을 식민지로 확보하며 나미비아에 해당하는 지역을 '독일령 남서아프리카'로 선포했다. 이 지역에는 헤레로족과 나마족 등 여러 토착 부족들이 살고 있었으며, 이들은 목축을 기반으로 자급자족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 식민당국은 이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강제 노동을 부과했으며, 식민 관리와 군인들은 원주민 여성에 대한 성폭력과 무차별 체포를 자행하였다. 특히 독일의 이민자들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토착민들의 삶의 기반은 급속히 무너졌고, 1904년 헤레로족은 더 이상의 억압에 맞서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헤레로족과 나마족에 대한 조직적 학살의 전개

1904년 1월, 헤레로족은 식민 정부의 부당한 정책과 폭력에 항거하여 독일군 주둔지를 공격하면서 반란을 시작했다. 독일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로타르 폰 트로타 장군을 파견하였고, 그는 매우 잔혹하고 조직적인 방식으로 반란을 진압했다. 1904년 10월, 트로타는 '헤레로족은 독일 영토를 떠나지 않는 한 전부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 명령은 곧바로 실행에 옮겨졌고, 독일군은 헤레로족을 오마헤케 사막으로 몰아넣고 식수와 식량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수만 명을 굶어 죽게 만들었다. 이후 1905년에는 나마족 또한 봉기를 일으켰고, 이들에 대해서도 유사한 방식의 학살이 자행되었다. 생존자들은 강제 수용소로 보내져 강제 노동과 인체 실험의 대상이 되었으며, 특히 샤크 아일랜드 수용소는 '죽음의 섬'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러한 사건들은 나치 시대 유대인 학살의 전조로 평가되기도 한다.

국제사회의 침묵과 현대의 반성적 조명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은 제국주의 시대의 인종주의와 식민 폭력의 극단적인 사례로, 약 8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된다. 당시 국제사회는 이 학살에 거의 무관심했으며, 독일 내에서도 일부 인도주의적 비판이 있었지만 대세를 뒤집지 못했다. 이 사건은 이후 오랜 기간 역사 속에 묻혀 있었으며, 나미비아가 독립한 후에야 점차 국제적 관심이 높아졌다. 2004년, 독일은 헤레로족 학살 100주년을 맞아 공식적으로 사과했지만, 법적 배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2021년 독일 정부는 헤레로와 나마족 학살을 ‘집단학살(Genozid)’로 공식 인정하고, 경제적 지원 패키지를 제안했으나 유족들은 법적 책임 인정과 개별 보상을 요구하며 여전히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이 사건은 오늘날에도 식민주의적 유산을 어떻게 반성하고 극복해야 하는지를 묻는 중요한 역사적 사례이며, 단순한 과거가 아닌 현재적 과제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