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동아시아를 둘러싼 패권 경쟁의 서막
19세기 후반, 조선은 내부적으로 개혁과 외세의 압박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이후 개화파와 수구파 간의 갈등이 격화되며 왕권도 흔들리던 시기였다. 이런 혼란 속에서 일본과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첨예한 경쟁을 벌이게 되었고, 이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조선 정부는 청에 병력을 요청했고, 일본도 텐진조약에 따라 군대를 파병하며 전운이 감돌았다. 일본은 조선 내 정세에 개입해 개화정권을 수립하게 하고 경복궁을 점령했다. 이는 곧 청나라와의 무력 충돌로 이어졌고, 마침내 1894년 7월 25일,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전쟁은 단순한 국지적 충돌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역사적 분기점이었다.
청일전쟁의 주요 전투와 일본군의 압도적인 승리
청일전쟁은 육상과 해상 모두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일본은 이미 근대화된 군대와 군수 시스템을 갖춘 상태였고,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식 군사체계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었다. 반면 청은 여전히 봉건적인 구조와 부패한 행정 체계 아래에 있었다. 대표적인 전투 중 하나는 평양 전투였다. 1894년 9월, 일본군은 조직적인 포위 작전을 통해 청군을 대파하고 평양을 점령하였다. 이어지는 해전에서는 황해 해전이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 전투에서 일본 해군은 청의 북양함대를 궤멸시키며 해상 장악권을 확보했고, 이는 이후 육상 작전의 자유도를 크게 높였다. 일본군은 요동 반도와 대련, 여순까지 진격하며 청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전략적으로 우위를 점했다. 청은 군사력뿐 아니라 내부 통제력에서도 한계를 드러냈고, 결국 일본과의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된다.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며 전쟁은 일본의 완승으로 끝났고, 청은 대만을 포함한 여러 지역을 할양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청일전쟁이 동아시아에 남긴 파장과 조선의 운명
청일전쟁의 결과는 단지 청의 패배로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 전쟁은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근본적인 재편을 의미했다. 중국은 수천 년 간 동아시아의 중심으로 군림해왔지만, 이 전쟁을 계기로 그 위상이 완전히 무너졌다. 일본은 이 승리를 통해 제국주의 국가로의 도약을 본격화하였고,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게 되었다. 특히 조선은 자주국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조선 내 친일파를 통해 정치적 개입을 강화하였고, 이는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또한 시모노세키 조약 이후 삼국간섭(러시아·독일·프랑스)이 발생하면서 일본은 유럽 열강의 벽을 실감하게 되었고, 이는 훗날 러일전쟁으로 이어지는 복선이 된다. 청일전쟁은 근대 동아시아의 패권이 일본으로 넘어간 전환점이자, 조선이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식민의 길로 접어드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전쟁의 승패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이후 펼쳐질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그림자가 동아시아 전역에 드리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