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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 보스워스 전투, 장미 전쟁을 끝내고 튜더 왕조를 세운 결전

by simplelifehub 2025. 11. 6.

백년 전쟁의 여운 속에서 영국 내전을 불러온 장미 전쟁

15세기 중반, 잉글랜드는 백년전쟁 이후 지리적 확장보다는 국내 정치의 혼란 속에 빠져들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내전이 바로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 사이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 일명 ‘장미 전쟁(Wars of the Roses)’이다. 붉은 장미를 상징으로 삼은 랭커스터가와 흰 장미를 사용한 요크가는 수십 년에 걸쳐 여러 차례 권력을 탈환하고 패배하는 복잡한 내전을 반복했다. 요크 가문의 리처드 3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그의 정통성은 많은 귀족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이 와중에 튜더 가문의 헨리 튜더가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했다. 헨리는 자신의 모계를 통해 랭커스터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며 왕위 도전을 선언했고, 이는 결국 1485년 보스워스 전투(Battle of Bosworth)로 귀결되었다. 이 전투는 단순한 전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중세에서 근세로 향하는 영국의 정치 전환점이자, 근대 왕권의 기초가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보스워스 전투의 전개와 리처드 3세의 몰락

1485년 8월 22일, 보스워스 전투는 잉글랜드 중부의 평야에서 벌어졌다. 왕 리처드 3세는 약 1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있었으며, 튜더 가문의 헨리 튜더는 프랑스에서 용병을 모집해 약 5천 명의 군사를 확보한 상태였다. 수적으로 불리한 헨리 측은 기동성과 협상을 통해 승기를 노렸고, 전투 당일 북쪽 귀족 토마스 스탠리 경과 그의 동생 윌리엄 스탠리의 결정적인 배신이 전황을 바꾸었다. 원래는 리처드 3세의 동맹으로 여겨졌던 스탠리 형제는 전투 도중 튜더 측에 가담하였고, 이로 인해 리처드는 전장 한가운데에서 고립되고 말았다. 리처드 3세는 자신이 직접 말을 타고 헨리에게 돌격하며 전세를 역전시키려 했지만, 결국 전사하게 된다. 그의 죽음은 중세적 왕권의 종말을 상징했으며, “말 한 필이면 왕국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전설적인 비극은 훗날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재조명되기도 한다. 이 전투는 리처드의 최후이자 요크 왕조의 종말, 그리고 새로운 왕조인 튜더 왕조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튜더 왕조의 수립과 영국 근세 정치의 전환점

보스워스 전투 직후 헨리 튜더는 헨리 7세로 즉위하며 튜더 왕조를 열었다. 그는 요크 가문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함으로써 두 가문 간의 오랜 내전을 상징적으로 종결지었다. 이는 정치적 통합의 의미를 넘어서서 영국 왕실 내 갈등을 해소하고 새로운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확립하는 데 기반이 되었다. 헨리 7세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귀족 세력을 통제하고, 조세 제도를 개혁하며 영국 재정의 기틀을 다졌다. 그의 통치는 뒤이은 헨리 8세, 엘리자베스 1세로 이어지는 튜더 왕조의 황금기 기반이 되었다. 특히 튜더 왕조는 종교 개혁, 해양 진출, 중상주의 등 영국이 근대 국가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보스워스 전투는 단순히 군사적 승패로 끝난 전투가 아니라, 영국 왕조사의 중대한 전환점이자, 정치 권력의 중심이 귀족에서 왕으로 집중되는 역사적 전환을 대표한다. 오늘날에도 이 전투는 잉글랜드 역사 교육에서 반드시 다루어지며, 리처드 3세의 유해가 2012년 레스터에서 발굴되면서 그에 대한 재평가와 더불어 역사의 흥미를 더욱 자극하는 사건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