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분할과 이스라엘 독립선언이 불러온 최초의 전면전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자마자 다음 날 아랍 국가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연합하여 침공을 개시했다. 이 사건은 제1차 중동 전쟁(1948~1949)의 서막이 되었으며, 현대 중동 분쟁사의 시작이기도 하다. 배경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유대인 이주의 급증, 영국 위임통치의 종료, 그리고 1947년 유엔의 팔레스타인 분할 결의안이 있었다. 이 결의안은 유대인과 아랍인을 각각 위한 국가를 세우자는 취지였지만 아랍 측은 이를 거부했고, 유대인은 이를 수용하여 이스라엘 국가 수립을 선언했다. 이 선언 직후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아랍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했으며,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아랍 연합군이 병력과 장비 면에서 우세했지만, 유대인 민병대였던 하가나가 빠르게 이스라엘 국방군(IDF)으로 재편되며 방어를 조직화했고, 외부로부터의 무기 수입도 활발히 이뤄졌다. 그 결과 전쟁의 주도권은 점차 이스라엘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각 전선의 전개와 이스라엘의 점진적 우위 확보
전쟁은 네 개의 주요 전선—북부의 갈릴리, 중부의 예루살렘, 남부의 네게브, 그리고 연안 지역—으로 나뉘어 전개되었다. 북부에서는 시리아와 레바논 군이, 중부에서는 요르단 아랍 군단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으며, 남부에서는 이집트 군이 연안을 따라 북상하였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구호를 위한 ‘나할작전’과 북부 해방을 위한 ‘하이파 작전’ 등 다양한 국지전과 전격전을 통해 점차 주도권을 되찾았다. 특히 요르단과의 전투에서 치열했던 라트룬 전투와, 이집트군과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반격이 되었던 ‘요압 작전’은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유엔의 중재로 인해 총 네 차례의 휴전이 선언되었지만 그때마다 전투는 재개되었고, 최종적으로 1949년 로도스 협정으로 정전이 체결되었다. 협정 결과, 이스라엘은 유엔이 할당한 영토보다 훨씬 넓은 지역을 점령했고, 요르단은 서안 지구를, 이집트는 가자 지구를 점령하게 되었다. 이는 향후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와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중동 지역에 남긴 상흔과 현대사에 끼친 파장
제1차 중동 전쟁은 단순한 지역 분쟁을 넘어서 냉전의 구도, 민족주의의 확산, 그리고 종교 갈등의 구조가 복합적으로 얽힌 국제 정치의 서막이었다. 이스라엘은 독립 직후 전쟁에서 살아남음으로써 자국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지만, 동시에 약 70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하여 난민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중동의 주요 갈등 요소로 남아 있다. 아랍 국가들은 내부적으로는 패배의 충격과 정치적 혼란을 겪었고, 이로 인해 군부 쿠데타나 급진 세력의 부상이 잇따랐다. 또한 서방 세계와 소련의 개입이 본격화되면서 중동은 냉전의 또 다른 전장이 되었고, 이후 1956년 수에즈 전쟁,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 1973년 욤키푸르 전쟁 등 연속된 분쟁의 연쇄 반응이 시작되었다. 제1차 중동 전쟁은 단 한 번의 전쟁으로 끝나지 않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고착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국제적 난제로 남아 있다. 전쟁은 단순한 승패 이상의 문제였으며, 국경과 국민의 운명을 결정짓는 역사의 분기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