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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 백년전쟁과 중세 유럽의 권력 판도 변화

by simplelifehub 2025. 10. 29.

왕위 계승을 둘러싼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충돌

백년전쟁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약 116년에 걸쳐 벌어진 장기 전쟁으로, 중세 유럽에서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왕위 계승권과 영토 분쟁에서 촉발된 유럽사 최대 규모의 전쟁 중 하나이다. 그 기원은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의 샤를 4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그의 외조카였던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가 자신도 왕위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하며 분쟁이 시작되었다. 이에 프랑스 귀족들은 살리카 법에 따라 여성 계통의 후손은 왕위 계승에서 배제된다고 주장하며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 6세를 왕으로 옹립했고, 잉글랜드는 이에 반발하며 프랑스에 대한 군사 행동을 개시했다. 초기에는 잉글랜드가 전황을 주도하며 크레시 전투(1346), 푸아티에 전투(1356) 등에서 프랑스군에 큰 타격을 입혔고, 이는 프랑스 내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 위기를 가속화시켰다. 그러나 이 백년전쟁은 단일한 전투가 아니라 여러 국면으로 나뉘어 전개되었고, 장기간 지속되며 유럽 전역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잔다르크의 등장과 프랑스 민족의식의 부활

백년전쟁은 중세 유럽의 봉건적 질서 속에서 점차 민족 국가로의 전환을 촉진한 계기이기도 했다. 특히 15세기 초반, 프랑스는 거의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잉글랜드는 프랑스 북부와 파리를 장악했고, 프랑스의 왕세자였던 샤를 7세는 남부 루아르 지방으로 밀려나 있었다. 이 와중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잔다르크였다. 그녀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프랑스를 구원할 사명을 띠고 등장했고, 오를레앙 공방전(1429)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며 프랑스 국민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이후 샤를 7세의 대관식을 지원함으로써 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비록 잔다르크는 영국에 포로로 잡혀 화형을 당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았지만, 그녀의 등장은 프랑스 내 민족주의 감정의 부흥과 함께 정치적, 종교적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잔다르크의 등장은 중세 후기 유럽에서 하층민과 여성도 역사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전쟁의 종결과 근세 유럽 질서의 서막

1453년 카스티용 전투를 끝으로 백년전쟁은 종결되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는 잉글랜드군을 결정적으로 격퇴하며 프랑스 북부 지역 대부분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고, 이로써 잉글랜드는 대륙 내 거의 모든 영토를 상실하게 되었다. 칼레만이 잉글랜드의 유일한 대륙 영토로 남았고, 이는 이후 튜더 왕조 시대까지 유지되다 1558년에야 프랑스에 완전히 귀속되었다. 백년전쟁은 단순한 전쟁 그 이상이었다. 이 전쟁을 통해 양국 모두 중앙집권적 왕권이 강화되었고, 중세적 봉건 제도의 해체가 가속화되었다. 특히 프랑스는 이 전쟁을 계기로 군사 및 행정 체제를 정비하며 근세 절대왕정의 기반을 마련했고, 잉글랜드는 전쟁 후 내전에 돌입하게 되면서 장미 전쟁이라는 또 다른 정치적 격동기로 진입하게 되었다. 또한 전쟁 과정에서 활발히 사용된 장궁, 화약 무기, 상비군 체제 등의 등장은 유럽 전쟁 양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이는 곧 근대 군사 혁명의 출발점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백년전쟁은 단순한 영토 분쟁이 아니라 유럽 중세 질서의 해체와 근대 국가 체제로의 이행을 이끈 역사적 분수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