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팽창 속에서 벌어진 일본과 중국의 충돌
중일전쟁은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이어진 대규모 전쟁으로, 일본 제국과 중화민국 간의 무력 충돌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전역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 전쟁은 1931년 만주사변으로부터 시작된 일본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된 것이며, 특히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노구교) 사건을 계기로 전면전이 발발하였다. 일본은 만주국을 세운 후에도 중국 본토로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고, 이는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정부와 직접적인 군사 충돌로 이어졌다. 초기 전황은 일본이 우세하였다. 베이징, 상하이, 난징 등 주요 도시를 단기간 내에 점령하며 전세를 장악했다. 하지만 중국은 장기전 체제로 전환하며 내부적으로 국민당과 공산당이 일시적으로 제2차 국공합작을 통해 항일 전선을 구성했고, 광활한 지형과 민족적 저항은 일본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특히, 일본의 잔혹한 점령 방식은 중국 민중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장기적 저항의 기반이 되었다.
난징대학살과 국제사회의 여론 변화
1937년 말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한 후 대량 학살과 강간, 방화 등 전대미문의 만행을 저질렀다. 이는 역사적으로 ‘난징대학살’로 기록되며, 당시 약 30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고 추산된다. 이 사건은 단순한 군사 점령을 넘어, 전쟁 범죄와 인도주의 위기에 대한 국제적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서구 언론과 외교관들을 통해 이 만행은 널리 알려졌고, 미국과 영국을 포함한 주요 국가들의 대일본 인식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연맹은 실질적인 개입을 하지 못했으며, 일본은 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 채 전쟁을 확대해갔다. 이러한 잔혹행위는 일본군의 전체 전쟁 전략이 얼마나 민간인을 무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후 전범재판에서도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중일전쟁이 단순한 영토 분쟁이 아닌 문명과 반문명 간의 충돌로 인식되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중국 국민들의 항전 의지를 더욱 고취시켰다.
태평양전쟁으로의 확산과 중일전쟁의 종결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기점으로 미국이 참전하면서 중일전쟁은 태평양전쟁이라는 전지구적 전쟁의 일부로 흡수되었다. 중국은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미국, 영국, 소련과 협력하게 되었고, 특히 버마 루트를 통한 연합군의 보급과 지원은 중국군의 전력 유지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일본은 수많은 전선을 동시에 감당하면서 점차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했고, 1945년 미국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은 일본의 항복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 9월, 일본의 공식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며 중일전쟁 역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의 상처는 오랫동안 남았다. 중국은 전후 국공내전으로 다시 분열되었고, 일본은 점령과 재편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중일전쟁은 동아시아 현대사의 분기점이었으며,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과 민족 자결 의지, 그리고 전후 국제질서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이 전쟁은 한 국가의 침략이 지역적 갈등을 넘어 세계 전쟁으로 확대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