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와 프랑스, 왕위 계승에서 시작된 장기 전쟁
백년전쟁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약 116년에 걸쳐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쟁들을 총칭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표면적으로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분쟁에서 출발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두 국가 간의 패권 다툼과 중세 봉건 체제의 해체, 근대 국가 체제의 출현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변동을 의미한다. 이 전쟁은 단일한 전쟁이라기보다는 휴전과 재개가 반복된 여러 갈래의 전투들로 구성되며, 크레시 전투(1346), 푸아티에 전투(1356), 아쟁쿠르 전투(1415) 등 결정적인 전투가 연속적으로 발생했다. 잉글랜드는 전쟁 초기 장궁을 이용한 전술 혁신과 기동전으로 전과를 거두었지만, 점차 프랑스의 내적 결속과 군사 개혁에 밀려 후반부에는 전세가 역전된다. 특히 전쟁 후기에 등장한 잔 다르크는 프랑스 국민의 항전 의지를 고양시키고, 프랑스 왕실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백년전쟁은 단순한 영토 분쟁이나 왕위 계승 문제가 아니라, 중세와 근대를 가르는 역사적 전환점으로서 평가된다.
군사 기술과 병종의 변화, 장궁과 화약의 도입
백년전쟁은 전술적으로도 중대한 전환점을 제공하였다. 특히 잉글랜드가 도입한 장궁은 중세 유럽 전쟁 양식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장궁은 기존의 중장기병 중심의 봉건 전투 체계를 무력화시키며, 보병의 비중을 크게 증가시켰다. 이는 군사적 효율성뿐 아니라, 사회적 구조에도 영향을 미쳐 중세적 질서의 약화를 촉진하였다. 후반기에 이르러서는 화약 무기의 사용도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성곽 중심의 방어 전술은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이러한 무기의 발전은 더 이상 귀족 중심의 기사 계급만으로 전쟁을 치를 수 없게 만들었고, 중앙집권적인 국왕 주도의 군사 체제를 요구하게 되었다. 또한 병사들의 모집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과거의 봉건 의무 대신 급여를 받는 용병과 직업 군인의 비중이 늘어나며, 이는 국가가 전쟁을 통제하고 재정적으로 책임지는 구조로 이어진다. 백년전쟁은 이렇게 군사 기술과 조직의 변화 속에서 근대 전쟁의 원형을 형성했으며, 전쟁 수행 방식의 근본적인 재편을 가져왔다. 이처럼 장기적인 전쟁은 단순히 전장에서의 승패를 넘어, 군사 기술과 병참 체계의 변화를 이끌며 근대 군대의 모태를 만들어낸 것이다.
백년전쟁이 남긴 정치적 결과와 근대국가의 기초
백년전쟁은 프랑스와 잉글랜드 모두에게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대변혁을 안겼다. 프랑스는 전쟁 후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집권화가 진행되어, 근대국가로서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특히 샤를 7세 이후의 왕들은 관료제를 정비하고 상비군을 조직하여 국왕 중심의 통치체제를 강화하였다. 반면 잉글랜드는 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재정난과 귀족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이는 결국 장미전쟁이라는 내전에 불을 지피는 결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잉글랜드 역시 의회의 역할이 강화되면서, 왕권과 의회의 균형이라는 영국 헌정주의의 초석이 이 시기에 놓이게 된다. 또한 두 나라 모두에서 ‘국민’이라는 개념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장기적인 전쟁 수행 과정에서 왕과 국가를 위한 충성, 국토 방위에 대한 의식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며, 근대적 민족 정체성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잔 다르크가 신성한 인물로 추앙되며, 국가와 민족을 동일시하는 서사가 형성되었다. 이처럼 백년전쟁은 단순한 중세 말기의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군사와 정치, 사회 전반을 뒤흔든 대전환점이었다. 오늘날의 국가 시스템과 국민 개념은 이 전쟁을 거치며 점차 구체화되었고, 근대유럽의 형성은 백년전쟁이라는 긴 시간 속에서 태동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