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이 택한 전략폭격의 새로운 전환점
1943년 여름, 연합군은 독일의 주요 산업 도시 함부르크를 대상으로 '고모라 작전(Operation Gomorrah)'이라 명명된 대규모 공습을 감행했다. 이는 전쟁사에서 민간 피해 규모가 가장 컸던 도시 공습 중 하나로, 단순한 군사적 파괴를 넘어 독일 국민의 사기를 꺾기 위한 심리전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당시 영국 공군(RAF)과 미군 8공군은 협업 체제를 통해 야간과 주간 공습을 교차적으로 수행하였으며, 함부르크는 산업시설뿐 아니라 주거지역 전체가 타겟이 되었다. 이 공습은 단순히 폭탄 투하의 양을 늘리는 방식이 아니라, 신형 전파 교란 장비인 ‘윈도우(Window)’ 기술이 도입된 첫 사례로, 독일군의 방공망을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한 영국군은 인화성이 극도로 높은 소이탄을 집중 투하하여 도시 전체에 '화재폭풍(Firestorm)'을 유발했고, 이는 일반적인 화재가 아닌 자체 산소 순환을 일으키는 초대형 화염지옥으로 확산되어 막대한 피해를 초래하게 된다.
불바다로 변한 도시와 전쟁의 비인간성이 드러난 비극의 현장
총 8일간의 함부르크 공습은 전례 없는 파괴를 남겼다. 4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수십만 명이 부상을 입거나 피난을 떠나야 했다. 도심 전체가 무너졌으며, 철도, 항만, 공장, 병원까지 모두 기능을 상실했다. 특히 7월 27일 밤 영국 공군의 야간 폭격은 가장 치명적이었는데, 대규모 소이탄 투하로 인해 도시는 섭씨 800도 이상의 화염에 휩싸이며 ‘불기둥’이 형성되었고, 이는 산소를 빨아들이며 사람들을 질식시키거나 불길 속으로 끌어들이는 참사를 낳았다. 당시 대피소에 있던 사람들조차도 질식사하거나 고온으로 인해 사망했으며, 철로, 아스팔트가 녹아내리는 지옥과 같은 광경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함부르크는 군사시설 외에도 민간 지역 전체가 소멸하다시피 하였고, 전쟁의 참혹함을 상징하는 도시로 기록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이 공습이 단지 전쟁의 일부라기보다, 무차별 전략폭격이 가져올 수 있는 윤리적 문제와 전쟁의 본질을 되묻는 계기로 보고 있다. 특히,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집단적 폭력의 정당성 여부, 전후 복구와 집단 기억의 형성 등은 함부르크 공습 이후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함부르크 공습이 남긴 전쟁 전략과 윤리의 교차점
함부르크 공습은 군사적으로 연합군이 전략폭격의 효율성을 과시한 사례이지만, 동시에 무차별 폭격의 윤리성과 비인간성에 대한 논쟁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당시 영국은 독일의 전쟁지속 능력을 마비시키고, 독일 국민의 전쟁 의지를 꺾는 것이 목표라고 주장했지만, 그 대가로 치른 민간인 사상은 그 어떤 전과보다도 깊은 상흔을 남겼다. 전후 독일 사회는 함부르크의 폐허 위에서 복구를 진행했으며,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기념비와 전쟁박물관이 들어서면서 평화 교육의 장으로 재구성되었다. 또한 국제사회에서도 함부르크 공습을 계기로 전쟁 중 민간인 보호 문제, 국제 인도법 강화, 전략폭격의 제한 등에 대한 조약 논의가 활성화되었다. 함부르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도시 중심부에서 그 당시의 폭격 흔적을 일부 유지하고 있으며, 전쟁이 단지 군사적 행위만이 아닌 인류 전체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되새기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존재한다. 이처럼 함부르크 공습은 단순한 전투가 아니라, 전쟁이 어디까지 인간성을 잃을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이정표로 기억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