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의 후반부, 미군의 전략적 선택지로서의 이오지마
이오지마 전투는 1945년 2월 19일부터 3월 26일까지 약 36일간 이어졌으며, 태평양 전쟁 후반부에 벌어진 가장 치열하고 상징적인 전투 중 하나였다. 이오지마는 일본 도쿄 남쪽 약 1,20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작은 화산섬으로, 당시 일본 본토 방공망의 일환으로 기능하고 있었으며, 전략 폭격기의 발진 및 귀환 거점으로도 활용될 수 있는 중요한 위치였다. 특히 미군은 B-29 슈퍼포트리스 폭격기의 일본 본토 공습 작전 수행 중 발생하는 기술적 문제나 연료 부족 상황에서 이오지마를 응급 착륙지로 활용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일본 또한 이러한 전략적 가치를 인식하고 있었기에, 해당 섬에 약 21,000여 명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수천 개의 방공호, 벙커, 연결 터널 등을 구축하며 철저한 방어 태세를 갖췄다. 결국 이오지마 전투는 단순한 영토 점령의 문제를 넘어서 전후 아시아 태평양 질서를 좌우할 수 있는 상징적 충돌로 전개되었다.
섬 전체를 요새화한 일본군과 이에 맞선 미 해병대의 사투
미군은 이오지마 전투에 제3, 제4, 제5 해병사단을 포함한 총 70,000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했으며, 상륙 전 3일간의 대규모 폭격과 함포사격을 통해 일본군 방어선을 약화시키려 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방어진은 기존의 해안 방어 중심 전술에서 벗어나, 섬 전체를 요새화한 형태로 재편되어 있었다. 일본군 지휘관 구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은 병사들에게 해변이 아니라 내부 방공호와 은폐된 벙커에서 장기 지연전을 펼치도록 지시했다. 이로 인해 미 해병대는 상륙 직후 강한 저항을 받지 않았으나, 섬 안쪽으로 진격할수록 치열한 게릴라식 저항과 복잡하게 얽힌 터널망에 시달리게 되었다. 미군의 진격은 하루에 수십 미터에 불과할 정도로 더뎠으며, 일본군은 수류탄, 기관총, 저격수, 화염병 등을 활용하여 끝까지 저항했다. 사루바치 산을 점령하는 과정에서는 미군 병사들이 눈에 보이는 목표를 향해 돌진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945년 2월 23일, 미 해병대가 사루바치 산 정상에 성조기를 게양하는 장면은 조 로즌탈의 사진을 통해 세계적으로 알려졌고, 이는 곧 전쟁 영웅주의와 애국심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 장면 뒤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참혹한 전투와 수만 명에 이르는 희생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실제 전투는 국기 게양 이후에도 한 달 가까이 이어졌다.
역사에 남은 상징성과 전쟁의 비인간성이 공존한 섬
이오지마 전투는 미군 6,800여 명 사망, 19,000명 이상 부상이라는 막대한 피해를 남겼으며, 일본군은 약 21,000명 중 200명도 채 생존하지 못할 정도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은 항복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우는 것을 명예로 여겼으며, 구리바야시 중장 역시 자결 혹은 전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전투는 현대전에 있어서도 유례없는 밀집 전투의 사례로 남아 있으며, 이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전까지 일본 본토 침공이 현실화되었을 경우 어떤 치열한 저항이 벌어졌을지를 암시하는 경고가 되었다. 미군이 이오지마를 점령함으로써 B-29 폭격기의 응급 착륙이 가능해졌고, 이는 전략 폭격의 효율성과 생존률을 크게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투 후 이오지마는 미군의 상징적인 장소로 활용되었으며, 미 해병대 전몰자 추모비가 세워져 현재까지도 해병대 역사에서 중요한 기념 장소로 남아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오지마는 전쟁이 인간성을 어디까지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장이기도 하다. 오늘날 이 섬은 일본 정부의 관할 하에 있으나, 일반인의 출입은 통제되어 있으며, 매년 일부 유족과 참전 용사만이 제한적으로 방문할 수 있는 공간으로 남아 있다. 전장의 영웅적 서사 뒤에 숨겨진 진실은, 우리가 전쟁을 기억할 때 단지 승리와 패배가 아닌, 그 속에 존재한 인간의 고통과 희생을 되새겨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이오지마는 그러한 역사의 무게를 고스란히 간직한 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