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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 오키나와 전투, 태평양 전쟁 최후의 결전이자 참혹한 민간인 피해

by simplelifehub 2025. 10. 25.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를 장식한 오키나와 전투의 전략적 배경

1945년 4월부터 6월까지 약 82일 동안 이어진 오키나와 전투는 태평양 전쟁의 마지막 대규모 지상전으로 기록되며, 일본 본토를 침공하기 전 미국이 수행한 결정적인 작전이었다. 오키나와는 일본 규슈 남쪽에 위치한 류큐 열도의 중심 섬으로, 일본 본토로 진입하는 데 있어 중요한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는 전략적 거점이었다. 미국은 일본의 저항이 극심할 것을 예상하면서도, 전쟁의 종결을 앞당기고 소련의 참전을 견제하기 위해 이 섬을 반드시 점령할 필요가 있었다. 반면 일본은 본토 방어를 위해 오키나와를 ‘결전의 섬’으로 삼고, 민간인을 포함한 총력전을 준비하였다. 이로 인해 오키나와는 군인뿐 아니라 수많은 민간인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비극의 현장이 되었다.

지상전, 해상전, 공중전이 동시에 벌어진 종합 전장의 양상

오키나와 전투는 육상, 해상, 공중에서 동시에 진행된 복합적인 양상의 전투였다. 미군은 1,500척 이상의 함선과 18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여 오키나와 해안에 상륙하였고, 일본군은 약 10만 명의 병력과 방어 진지를 활용하여 조직적인 저항을 펼쳤다. 일본군은 전통적인 해안 방어보다는 내륙의 산악 지형과 동굴을 활용한 지연 작전을 펼쳤고, 이로 인해 전투는 수 킬로미터를 전진하는 데도 수 주가 걸리는 지리한 양상이 되었다. 특히, 일본군은 수백 대의 가미카제 특공기를 동원하여 미 해군 함대를 공격하였고, 이는 미국 해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미군은 이러한 자살 공격을 막기 위해 지속적인 항공기 요격과 함대 대공 방어망을 구축하였으나, 피해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지상전에서도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과 복잡한 방어진지 구조는 미군의 진격을 크게 지연시켰고, 고지 하나를 점령하기 위해 수천 명이 희생되는 일도 다반사였다.

민간인의 희생과 전후 일본 사회에 남긴 깊은 상처

오키나와 전투는 군사적 측면뿐 아니라 민간인 피해 측면에서 가장 참혹한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당시 오키나와 인구의 약 4분의 1이 전쟁 중에 사망하였으며, 이 중 대부분이 민간인이었다. 일본군은 민간인들에게 자살을 강요하거나, 미군에 협력할 경우 적으로 간주하겠다는 협박을 통해 주민들을 전쟁에 끌어들였다. 이로 인해 수많은 가족이 동반 자살하거나, 피난 중에 목숨을 잃는 사례가 속출하였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수류탄 자살을 지시한 사례도 있었으며, 이는 전후 일본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또한 미군의 집중 포격과 폭격, 화염방사기 사용 등도 민간인 사망의 큰 원인이 되었으며, 전투가 끝난 후에도 질병과 기아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오키나와 전투의 참상은 이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정당화하는 논리로도 활용되었고, 이는 전쟁의 종결과 더불어 냉전 질서로 이어지는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오늘날 오키나와는 일본 내에서도 독특한 역사적 기억을 가진 지역으로 남아 있으며, 미군 기지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오키나와 전투는 단순한 군사적 충돌을 넘어, 전쟁이 민간 사회에 끼치는 파괴적 영향과 그 기억의 지속성에 대해 성찰하게 만드는 역사적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