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프랑스의 왕위 계승 분쟁으로 점화된 유럽 최장기 전쟁
14세기 중반, 유럽은 두 강대국 간의 치열한 분쟁으로 인해 오랜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바로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벌어진 ‘100년 전쟁’이다. 이 전쟁은 단순한 영토 분쟁을 넘어, 프랑스 왕위 계승을 둘러싼 근본적인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프랑스의 발루아 왕가가 왕위를 계승하자,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이 모계로 프랑스 왕위를 계승할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전쟁을 선포했다. 이에 따라 1337년부터 1453년까지, 무려 116년에 걸쳐 양국은 군사적 충돌을 반복했고, 그 중심에는 다양한 전투와 정치적 변화가 얽혀 있었다. 초기에는 영국이 장궁(longbow)을 활용한 전술적 우위를 바탕으로 프랑스를 압도했으나, 후반에는 프랑스 내부 결속과 외교적 역전이 이어지며 전쟁의 양상이 바뀌게 되었다. 이 긴 전쟁은 중세 봉건 질서의 해체와 근대 국가 형성의 초석을 다졌으며, 특히 주요 전투에서의 전술적 혁신은 유럽 전쟁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아쟁쿠르 전투에서 드러난 장궁의 파괴력과 중세 기사의 몰락
100년 전쟁에서 가장 상징적인 전투 중 하나는 1415년의 아쟁쿠르 전투였다. 이 전투는 영국의 헨리 5세가 프랑스 북부를 침공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결정적 충돌이었다. 당시 헨리 5세는 약 6천 명의 병력만을 보유하고 있었고, 대부분은 장궁병이 중심이었다. 반면, 프랑스는 약 2만 명에 이르는 대군을 동원해 맞섰고, 기병과 중장기사가 주력이었다. 그러나 아쟁쿠르 전투의 결과는 놀라웠다. 헨리 5세는 진흙투성이의 좁은 전장을 활용해 프랑스 기병의 돌격을 무력화했고, 장궁병의 정확한 사격은 프랑스 기사들을 차례로 쓰러뜨렸다. 특히 장궁의 관통력은 중세 기사들의 철갑 방어구마저도 뚫을 수 있었고, 이로 인해 프랑스군은 대혼란에 빠졌다. 전투 후, 프랑스는 약 6천 명 이상의 전사자를 기록했으며, 귀족과 기사계급의 피해가 막대했다. 이 전투는 단순한 전술적 승리를 넘어서, 중세 기사 계급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또한, 보병 중심의 군대가 장비와 지형을 활용할 경우 기병을 압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쟁의 양상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아쟁쿠르 이후의 전개와 100년 전쟁이 남긴 유산
아쟁쿠르 전투 이후 영국은 북프랑스 일대를 장악하며 일시적인 우위를 점했으나, 전쟁은 계속 이어졌고 전세는 다시 뒤바뀌게 된다. 잔 다르크라는 상징적인 인물의 등장은 프랑스의 민족적 결속을 불러일으켰고, 오를레앙 해방 이후 프랑스의 반격은 본격화되었다. 특히 프랑스는 화약 무기와 보병 중심의 군대를 체계화하면서 점차 영국을 밀어냈고,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서의 결정적 승리를 통해 영국을 대륙에서 거의 완전히 철수시켰다. 100년 전쟁은 전통적 봉건 질서의 종말을 가속화했고, 중앙집권적 왕권 강화와 신흥 민족주의의 등장을 촉진시켰다. 아쟁쿠르 전투는 이 긴 전쟁의 중간 국면에서 ‘전술의 진화’와 ‘계급의 변동’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 장면으로, 오늘날까지도 전쟁사의 고전적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또한, 이 전투에서 보여진 헨리 5세의 지도력과 장궁의 전술적 활용은 이후 유럽 각국 군대 편제에 큰 영향을 미쳤고, 기사 중심의 전쟁 방식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결국 100년 전쟁은 단순한 국가 간의 충돌이 아니라,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이라는 거대한 변화의 일환이었으며, 아쟁쿠르는 그 변화의 물줄기를 가른 전환점 중 하나로 기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