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크가와 랭커스터가의 왕위 쟁탈전으로 벌어진 내전의 서막
15세기 중반, 영국은 백년전쟁의 여파와 잇따른 왕위 약화로 인해 정치적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헨리 6세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로 국정을 제대로 이끌지 못하자, 왕위를 정통성 있게 계승하길 바랐던 요크가(Richard of York)가 중심이 되어 랭커스터가에 대항하였다. 이 두 가문은 모두 플랜태저넷 왕가의 일원으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었기에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455년에 시작된 이 내전은 ‘장미전쟁(Wars of the Roses)’이라 불리는데, 요크가의 상징이 하얀 장미, 랭커스터가의 상징이 붉은 장미였던 데서 유래한다. 이 전쟁은 단순한 왕위 다툼을 넘어, 귀족 간의 세력 균형, 지방 호족들의 충성 갈등, 그리고 중앙정부의 권위 약화라는 다층적 문제를 포함하고 있었다.
결전을 향한 반복되는 전투와 권력의 끊임없는 교체
장미전쟁의 양상은 극단적인 피의 반복이었다. 초기에는 요크가가 우세했으나, 리처드 요크가 1460년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전사하며 다시 랭커스터 쪽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리처드의 아들 에드워드가 빠르게 왕위를 계승해 에드워드 4세로 즉위하고, 1461년 토우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요크가가 다시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후에도 양측은 반복적으로 전투를 벌이며 권력을 쟁탈했고, 정치적 암살과 배신, 귀족 간 이합집산이 이어졌다. 특히 워릭 백작(Richard Neville)은 ‘킹메이커(Kingmaker)’라는 별명에 걸맞게 양 진영을 오가며 왕을 만들고 무너뜨렸다. 이 내전은 전투 못지않게 정략 결혼과 음모, 귀족의 이중적 충성이라는 정치 드라마로도 점철되어 있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국민들은 과세와 징병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왕권의 정당성에 대한 회의가 심화되었다.
헨리 튜더의 승리와 튜더 왕조의 시작, 그리고 장미전쟁의 종식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프랑스로 망명해 있던 헨리 튜더가 돌아와 리처드 3세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새로운 왕조의 시작을 알린 것이다. 이 승리는 군사적 전략뿐 아니라, 내부의 배신과 귀족 세력의 균열로 인해 가능했다. 리처드 3세는 전투 중 사망하였고, 헨리 튜더는 헨리 7세로 즉위해 튜더 왕조를 창건하였다. 헨리 7세는 요크가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두 가문의 상징인 붉은 장미와 흰 장미를 결합한 ‘튜더 장미’를 통해 상징적으로 전쟁을 종결시켰다. 장미전쟁은 잉글랜드의 중세적 봉건체제를 붕괴시키고, 강력한 중앙집권 왕권으로의 전환을 이끌었다. 또한 귀족 세력이 대거 몰락하고, 튜더 왕조는 이후 100년간 영국의 정치적 안정을 가져오며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 준비를 하게 되었다. 전쟁의 승패뿐 아니라, 그 여파가 국가 체제의 근본적 전환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장미전쟁은 단순한 왕위 계승 전쟁을 넘어 정치 구조 개편의 분기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