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전쟁사 - 오사 전쟁과 덴마크 패권의 몰락, 북유럽 정세의 대전환

by simplelifehub 2025. 10. 14.

덴마크 중심의 칼마르 동맹과 스웨덴의 반발로부터 비롯된 갈등

14세기 말부터 16세기 초까지 북유럽의 정세는 ‘칼마르 동맹’이라는 정치 연합에 의해 유지되었다.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세 왕국은 명목상 하나의 군주 아래 통합되어 있었으나, 실질적인 주도권은 덴마크가 쥐고 있었다. 이로 인해 스웨덴 귀족들과 상인들 사이에서 덴마크의 과도한 개입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고, 16세기 초 스웨덴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스웨덴 귀족이었던 구스타브 바사(Gustav Vasa)가 반란을 일으키며 폭발했고, 그는 1523년 스웨덴 왕으로 즉위하며 동맹을 탈퇴했다. 이후 약 한 세기 동안 덴마크와 스웨덴은 수차례 전쟁을 반복했고, 그중 가장 결정적인 충돌이 바로 1657년부터 1660년까지 벌어진 ‘오사 전쟁’(Dano-Swedish War)이다.

오사 전쟁의 발발과 스웨덴의 기습적 침공, 코펜하겐 포위까지

1657년, 덴마크는 스웨덴이 신성로마제국과의 전쟁으로 군사력을 소진한 틈을 노려 기습적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상황은 덴마크의 예상과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다. 스웨덴의 명장 칼 구스타브 10세는 빠르게 병력을 재편성하여 역공에 나섰고, 덴마크 본토로 진격하였다. 특히 1658년 겨울, 발트해가 얼어붙은 틈을 타 얼음 위를 통해 군대를 이끌고 질주한 ‘벨트 해협 횡단’은 북유럽 전쟁사에서 가장 기상천외하면서도 전략적으로 성공한 기동작전 중 하나로 꼽힌다. 스웨덴군은 곧바로 셸란 섬으로 돌입해 코펜하겐을 포위하며 덴마크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다. 이 전격적인 작전은 유럽 전역에 충격을 주었고,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기후 조건을 역이용한 승부수였다.

전쟁의 종결과 스웨덴 패권의 확대, 덴마크 영향력의 후퇴

1658년, 양국은 로스킬레 조약을 체결하며 일시적인 평화에 들어갔으나, 스웨덴은 코펜하겐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재차 침공을 감행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덴마크의 저항이 강했고, 외교적으로도 네덜란드와 신성로마제국이 덴마크를 지원하면서 전세는 다시 균형을 찾게 되었다. 1660년 코펜하겐 조약 체결로 전쟁은 종결되었고, 덴마크는 큰 영토를 상실했지만 수도는 지켜냈다. 이 전쟁을 통해 북유럽의 정치적 판도는 급변하였고, 스웨덴은 명실상부한 발트해 패권 국가로 부상하였다. 동시에 덴마크는 패권의 중심에서 밀려나며 이후 수세에 몰리는 입장이 되었다. 오사 전쟁은 단순한 국가 간의 충돌이 아니라, 해상 교역권과 발트해의 제해권을 둘러싼 전략적 경쟁이었다. 이 전쟁은 북유럽의 근대화를 촉진시켰으며, 이후 스웨덴 제국 시대의 서막을 여는 신호탄이 되었다. 또한 전장과 정치 무대에서 기후와 지형을 어떻게 전략적으로 활용하느냐에 따라 전쟁의 향방이 극적으로 바뀔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