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프랑스의 왕위 계승 분쟁으로 시작된 백년전쟁
14세기 중엽, 프랑스와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두 왕국으로 성장하며 상호간 정치·경제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그 갈등의 핵심에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과 플랑드르 지방의 통제권 문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1328년, 프랑스의 샤를 4세가 후계 없이 사망하자 그의 외조카였던 영국 국왕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며 전쟁의 서막을 연다. 하지만 프랑스 귀족들은 살리카 법에 따라 여성 혈통을 통한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 6세가 왕위에 오른다. 이 왕위 계승 분쟁은 곧 플랑드르의 상업적 이권, 노르망디·가스코뉴 지역의 영토 문제와 결합되며 장기적인 전쟁으로 비화하게 된다. 이후 1337년에 공식적으로 전쟁이 시작되며, 양국은 무려 116년에 걸쳐 여러 차례 간헐적으로 전투와 휴전을 반복하며 유럽 중세사에서 가장 긴 전쟁을 치르게 된다.
크레시와 아쟁쿠르 전투에서 드러난 잉글랜드 전술의 우위
백년전쟁 초기, 잉글랜드는 전술적으로 프랑스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크레시 전투(1346)에서는 장궁(Longbow)을 중심으로 한 보병 중심의 전술이 프랑스 기사들의 중세 전통 기병 중심 전술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이후 푸아티에 전투(1356)에서는 프랑스 국왕 장 2세가 포로로 잡히는 치욕을 겪으며 잉글랜드의 우위가 더욱 확고해졌다. 하지만 전쟁은 단순히 전투의 승패만으로 끝나지 않았고, 이후 프랑스는 내부의 혼란과 흑사병 등으로 약화되며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게 된다. 그 와중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잔 다르크'이다. 그녀는 한 시골 농가의 소녀였지만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믿음 아래 프랑스 왕세자 샤를 7세를 만나 군을 이끌 기회를 얻게 된다. 잔 다르크는 오를레앙 포위전을 극적으로 타개하며 민심을 결집시켰고, 이후 샤를 7세가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며 프랑스 국민들의 자긍심과 애국심을 일깨우는 상징적 존재가 된다.
전쟁의 종결과 잔 다르크의 유산이 남긴 민족국가의 씨앗
백년전쟁의 후반부는 프랑스의 반격이 이어지는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장기화된 전쟁과 내부 정치 갈등, 경제적 부담은 잉글랜드 왕실과 귀족 사회를 분열시켰고, 이로 인해 영국은 본토 내 장미전쟁이라는 또 다른 내전의 도화선을 안게 된다. 반면 프랑스는 샤를 7세 이후 왕권이 점차 강화되며 영국군을 점차 북서부 지역으로 밀어내고, 결국 1453년 보르도 탈환과 함께 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종결된다. 잔 다르크는 전쟁 중 체포되어 이단자로 몰려 화형을 당했지만, 그녀의 죽음은 오히려 프랑스인들에게 하나의 순교자로 기억되며 민족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백년전쟁은 단순한 군사 충돌이 아니라, 중세 유럽의 정치 질서를 재편한 전환점이었다. 이 전쟁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은 '국민'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한 초기 민족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고, 장궁과 화승총의 도입은 군사 기술의 혁신을 촉진하였다. 결국 백년전쟁은 유럽 근세 국가 체제의 서막을 알리는, 전쟁사의 중요한 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