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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 백제 멸망의 원인과 나당연합의 결정적 승리

by simplelifehub 2025. 10. 14.

삼국의 균형을 깨뜨린 백제의 오판과 나당연합의 성립

7세기 중반, 한반도의 삼국은 오랜 갈등과 불안정한 동맹 관계 속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백제는 한강 유역과 호남을 중심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했고, 고구려는 만주와 평양 일대에서 강대한 세력으로 군림하고 있었으며, 신라는 상대적으로 협소한 영토를 지니고 있었으나 꾸준한 정치적 안정과 외교 전략으로 세를 키우고 있었다. 이 와중에 백제는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삼국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실수를 범한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신라는 당나라와 외교적으로 접촉하였고, 고구려의 강경책에 부담을 느낀 당은 신라와의 연합에 동의하게 된다. 이른바 나당연합은 단순한 동맹을 넘어,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좌우할 중대한 연합전선으로 발전하며, 백제에 대해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하는 발판이 마련된다. 특히 당나라의 해상 수송 능력과 정예병력, 신라의 지형 정보와 토착 기반이 결합되면서 군사적으로도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이는 곧 백제의 멸망이라는 역사적 전환점으로 이어지게 된다.

황산벌 전투와 계백의 최후, 저항의 불씨가 꺼지다

660년, 나당연합군은 본격적인 백제 정벌에 나서며 공격을 개시했다. 당나라의 수군은 백강을 거슬러 진격했고, 신라의 지상군은 김유신의 지휘 아래 남하하며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목표로 압박하였다. 이에 맞선 백제는 계백 장군을 중심으로 황산벌에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계백은 단 5천 명의 군사로 신라의 대군에 맞서 싸웠고, 가족을 죽인 뒤 결사항전의 각오로 나아갔다. 황산벌 전투는 그야말로 백제 군사력의 마지막 불꽃이었으며, 죽음을 각오한 저항의 상징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수적 열세와 보급의 한계는 결국 극복되지 못했고, 백제군은 궤멸당하고 계백은 전사한다. 이 전투의 패배는 사비성 함락으로 직결되었고, 의자왕은 결국 항복하면서 678년간 존속해온 백제는 멸망하게 된다. 황산벌 전투는 단순한 전술적 충돌을 넘어, 한 국가의 마지막 기개와 의지가 소멸된 역사적 장면이자, 삼국 균형의 붕괴를 상징하는 비극이었다. 계백의 충절은 후대에 ‘충신의 상징’으로 남았으나, 전략적 측면에서는 이미 승부가 기운 싸움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백제 멸망의 교훈과 동아시아 전쟁사의 의미

백제의 멸망은 군사적 패배뿐 아니라 정치적 오판과 외교 실패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고구려와의 연합은 일시적으로 신라를 압박하는 데 성공했으나, 장기적인 국제 정세에 대한 판단 부족으로 인해 신라와 당의 연합을 막지 못했다. 또한 왕권의 전제화와 귀족 간의 알력 다툼, 농민 기반의 약화는 백제가 외부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게 한 내부적 요인이었다. 반면, 신라는 외부의 도움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였고, 김유신을 비롯한 장군들의 전략적 감각과 실행력이 백제와의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당나라 입장에서도 백제를 제압함으로써 동북아의 해상 패권을 장악하려는 전략적 의도가 있었다. 이처럼 백제의 멸망은 단순한 삼국 간의 갈등이 아니라, 국제 정치와 군사 전략, 지도자의 판단, 국민의 지지 기반 등 복합적 요소가 교차된 전쟁사적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백제 멸망은 나당전쟁과 고구려 정벌로 이어지는 한반도 통일 전쟁의 서막이자, 한 민족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되며, 외세와의 연합, 내정의 불안정이 어떻게 국가의 존망을 가를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