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과 연합군의 충돌, 전략적 요충지를 둘러싼 전투의 서막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 대륙을 넘어 중동과 동지중해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그중에서도 갈리폴리 반도를 둘러싼 전투는 단순한 영토 쟁탈전이 아니라, 제국들의 이해관계와 해상 교통로 장악을 둘러싼 국제 전략의 결정적 장이었다. 1915년 초,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연합군은 오스만 제국을 탈락시키고 러시아로 가는 해상 보급로를 확보하고자 다르다넬스 해협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 해협은 흑해와 에게해를 연결하는 중요한 수로로, 군사적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윈스턴 처칠이 해군장관으로 강력히 추진한 이 작전은 해상 폭격으로 시작되었으나, 오스만 제국의 강력한 저항과 복잡한 지형, 그리고 기뢰 설치 등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이에 따라 연합군은 육상 상륙작전을 강행하며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고, 이로써 갈리폴리 전역이라는 참혹한 참호전의 막이 오르게 된다. 호주와 뉴질랜드 병사들로 구성된 ANZAC(안작)군이 대거 투입되면서 이 전역은 향후 이들 국가의 국가 정체성에도 깊은 흔적을 남기게 된다.
갈리폴리에서의 참호전 양상과 병사들의 고통스러운 현실
갈리폴리 전역은 제1차 세계대전이 만들어낸 참호전의 극단적인 예시 중 하나로 꼽힌다. 연합군은 해안에 상륙했지만, 예상과 달리 오스만군의 치밀한 방어선과 험난한 지형에 가로막히며 진격이 멈추었다. 병사들은 불볕더위와 혹한, 식수 부족, 전염병, 그리고 진흙탕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으며, 참호 안에서는 시체 썩는 냄새와 해충으로 고통받았다. 오스만 제국의 지휘관 무스타파 케말은 뛰어난 전략적 판단과 결단력으로 방어를 지휘했고, 그의 활약은 이후 터키 공화국 창립의 기반이 된다. 전투는 장기간 교착 상태에 빠졌고, 양측 모두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으며 군사적 효과보다는 소모전의 양상으로 흘러갔다. 특히 ANZAC군의 피해는 심각했으며, 이들의 희생은 호주와 뉴질랜드 국민들의 집단적 기억 속에 ‘안작 데이(ANZAC Day)’라는 형태로 남게 된다. 갈리폴리에서의 전투는 전술적 실수, 지휘 체계의 혼란, 정보 부족 등으로 인해 끝없는 희생만을 양산했고, 결국 연합군은 뚜렷한 성과 없이 철수하게 된다. 이 철수는 드물게 성공적으로 이뤄졌지만, 이미 수만 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은 뒤였다.
갈리폴리 전역의 전쟁사적 의미와 제국주의 전쟁의 단면
갈리폴리 전역은 전술적으로는 실패한 작전이지만, 전쟁사적으로는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의미한다. 첫째, 이는 제국주의 전쟁이 비유럽 지역까지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전 세계적 충돌이라는 제1차 세계대전의 본질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둘째, 이 전역은 국민군의 개념이 자리잡기 시작한 계기로, ANZAC군의 투입과 희생은 이후 이들 국가의 독립적 정체성과 전통으로 이어진다. 셋째,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서 갈리폴리 승리는 단순한 방어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무스타파 케말이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갈리폴리 전투는 전쟁 계획의 무모함, 정보와 보급의 실패, 현장 지휘의 중요성 등 다양한 교훈을 남겼으며, 훗날의 상륙작전들—특히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는 이 실패에서 얻은 경험이 반영되기도 했다. 결국 갈리폴리는 단순한 전략적 요충지 확보 실패가 아니라,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혀 알지 못했던 땅에서 생을 마감한 전쟁의 비극이자, 제국 간 패권 다툼 속에 희생된 민중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는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권력의 욕망이 얼마나 잔혹한 현실을 만들어내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