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봉건 사회의 해체는 강력한 중앙 권력을 요구했다
중세 유럽 사회는 봉건제를 기반으로 왕과 제후, 기사, 농노 등 다양한 계층이 상호 계약과 충성을 바탕으로 얽혀 있는 분권적인 구조였다. 하지만 14세기 이후 흑사병의 대유행, 농민 반란, 백년전쟁 등의 사회적·경제적 혼란은 봉건 질서를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그 결과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가 점차 필요하게 되었다. 특히 상업 자본의 발달과 도시의 성장, 화폐 경제의 확산은 왕권 강화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교회 권위가 점차 약화되고 시민 계층이 부상하면서, 전통적인 귀족 중심의 분권 체제는 점차 구시대적인 체제로 여겨졌으며, 국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이 사회 안정과 경제 성장에 유리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로써 왕권은 귀족과 교회로부터 독립하여 점차 절대적 권위를 갖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정치적 혼란을 정리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울 수 있는 강력한 통치자가 요구되는 시대적 흐름이 절대왕정이라는 새로운 정치 체제를 탄생시키게 된다.
절대왕정은 상비군, 관료제, 중상주의로 특징지어진다
절대왕정은 왕이 국가 통치의 중심이 되어 의회나 귀족의 간섭 없이 모든 정책을 주도하는 체제로, 일반적으로 16세기부터 18세기 초반까지 유럽 전역에서 유행했다. 이 체제는 세 가지 중요한 제도적 기반 위에 세워졌다. 첫째는 상비군의 형성이다. 기존에는 전쟁 시에만 소집되는 귀족 중심의 봉건군이었지만, 절대왕정 하에서는 국왕이 직접 통제하는 직업 군대가 만들어졌고, 이는 왕권을 뒷받침하는 물리적 기반이 되었다. 둘째는 관료제의 확대다. 국왕은 전문 행정관료를 통해 전국을 통치하였고, 이는 과세·사법·행정의 효율성을 높이면서 왕권의 전국적 확산을 가능하게 했다. 셋째는 중상주의 경제 정책이다. 국왕은 경제를 통제하여 국가의 부를 축적하려 하였고, 금은의 유입과 무역흑자 유지, 식민지 확보 등을 통해 부국강병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정책은 국내 산업을 육성하고 수출을 장려하며,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이처럼 절대왕정은 단순한 정치 체제의 변화가 아니라 군사, 행정, 경제 전반에 걸친 국가 체계의 전환이자 현대 국가의 기초가 되는 중대한 역사적 흐름이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절대왕정의 전형으로 평가받는다
절대왕정의 대표적 사례로 프랑스의 루이 14세를 들 수 있다. 그는 "나는 곧 국가다(L'État, c'est moi)"라는 유명한 발언으로 절대왕권의 상징이 되었으며, 17세기 중후반부터 18세기 초까지 프랑스를 유럽의 최강국으로 이끌었다.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을 건설하여 귀족들을 중앙으로 불러들였고, 이를 통해 귀족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왕실 중심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또한 막대한 재정을 통해 상비군을 유지하며 주변국과의 전쟁을 통해 국경을 확장하고 국력을 과시했다. 그의 재무장관 콜베르는 중상주의 정책을 통해 산업을 육성하고 수출을 장려하였으며, 식민지 개척도 활발히 진행하였다. 그러나 루이 14세의 치세는 그 화려함 이면에 막대한 전쟁비용과 재정 적자를 동반했고, 말기에는 국민의 불만과 피로감이 누적되었다. 이처럼 절대왕정은 단기적으로는 국가 통합과 중앙집권에 성공했지만, 지나친 권력 집중과 재정 압박, 사회적 불평등은 이후 계몽사상과 시민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절대왕정은 유럽 근대사의 중요한 장이며, 그 긍정적 성과와 부정적 유산은 현대 정치 제도의 형성과 비교 정치학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사례로 분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