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 중심 질서의 한계가 실학의 출현을 자극하였다
조선은 건국 이래로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아 통치 체제를 운영해왔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에는 성리학적 명분과 의리가 점차 강화되면서, 사림 중심의 정치 질서가 공고해지고 왕권은 상대적으로 제약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경직된 유교 질서는 점차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국가 안보가 흔들렸고, 이후 붕당정치는 내분과 혼란을 반복하며 조정과 민심의 괴리를 초래했다. 또한 농업 중심의 경제 구조는 인구 증가와 시장 확대를 따라가지 못했으며, 세금 제도의 비합리성, 양반층의 특권 남용, 노비제의 비효율성 등 구조적 문제가 누적되어 갔다. 이런 복합적인 상황 속에서 기존의 성리학 이념으로는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기조로 한 실학이었다. 실학자들은 이론보다는 실제를, 명분보다는 효과를 중시하였고, 사회와 경제 구조의 개혁을 통해 민생을 안정시키려는 의지를 보였다. 즉 실학은 단순한 사상적 유행이 아니라, 조선 사회의 누적된 모순에 대한 체계적 대응이자, 근대적 전환을 향한 초기적인 자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실학자들은 농업, 상업, 기술 등 실생활 영역에서 개혁을 주장하였다
조선 후기 실학은 분야별로 다양한 분파와 관점을 형성하였는데, 대표적으로 경세치용학파, 이용후생학파, 북학파 등이 존재하였다. 경세치용학파는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으로 대표되며, 주로 토지 제도의 개혁과 행정 개혁에 관심을 가졌다. 유형원은 ‘균전론’을 주장하며, 신분에 따라 토지를 재분배하자는 이상을 제시하였고, 이익은 ‘한전론’을 통해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하는 토지의 국가 보장을 주장하였다. 정약용은 이를 더욱 구체화하여 정전제를 현실적으로 재해석하고, 거중기 등의 과학기술을 활용하여 백성의 노동 부담을 덜고자 했다. 이용후생학파는 서유구, 홍대용 등이 주축을 이루며 상공업 진흥, 기술 장려, 서양 과학의 수용 등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조선의 경제를 농업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상업과 수공업을 진흥시켜야 한다고 보았으며, 천문학, 지리학 등 자연과학의 중요성도 역설하였다. 북학파는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등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적극 수용하자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조선이 명분론에 갇혀 실용적 사유를 방기하고 있다며, 청의 실용적 기술과 상업 제도를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실학자들의 활동은 조선 사회의 구조적 개혁을 촉진하는 동력이 되었으며, 이후 근대화 담론의 기초로 작용하였다.
실학은 조선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근대화의 토대를 마련한 중간지대였다
실학은 단순히 기존 유교 사상의 반발이 아니라, 조선 사회의 내재적 문제 해결을 위한 합리적 대안으로 기능하였다. 실학자들은 전통 질서를 전면 부정하지 않고, 유교적 이상을 현실에 맞게 재해석하고 조정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예를 들어 정약용은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를 통해 지방 행정과 중앙 제도의 개선안을 제시하면서도, 성리학의 도덕적 기반은 여전히 중시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실학은 단절이 아니라 연속의 사상이며, 조선 후기 지식인들이 현실 문제에 대한 고민을 사상적, 정책적으로 풀어가려는 실천적 흐름이었다. 또한 실학은 민중에 대한 인식 변화를 수반하였다. 이전까지 정치와 철학의 중심에서 배제되어 있던 농민, 상인, 기술자 등 다양한 계층이 실학자들의 관심 대상이 되었고, 그들의 생활 여건 개선이 개혁의 목표가 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의 경제적 분화와 도시화, 인쇄물의 확산 등은 실학의 사상적 기반을 사회 전반에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실학은 이후 개화사상으로 이어지며 조선 말기 개혁 운동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고, 더 나아가 한국 근대 사상의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다시 말해 실학은 조선 후기의 사상사에서 가장 창조적이며 전환적인 운동이었으며, 오늘날에도 그 가치와 의의는 재조명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