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정치 혼란 속에서 새로운 이념으로 떠오른 성리학
조선 전기의 성리학 수용은 단순한 사상적 변화가 아니라, 국가의 통치 원리를 전환하는 대전환이었다. 고려 말기 불교가 타락하고 권문세족이 정국을 농단하면서, 많은 사대부들은 사회 혼란과 부패에 대한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이때 주목받은 것이 바로 송나라에서 발전한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과 천리, 예(禮)의 질서에 기반한 이상적인 사회를 그리며, 도덕성과 규범 중심의 정치 철학을 제시하였다. 특히 정몽주, 권근과 같은 유학자들이 성리학을 이념적으로 정제하고, 점차 젊은 사대부 계층에 의해 이상적 정치질서로 수용되면서 새로운 지식인의 기반이 형성되었다. 조선 건국의 주체였던 정도전 또한 유교 이념, 특히 성리학에 기초하여 새로운 국가를 구상했으며, 그 결과 조선은 불교 중심의 고려에서 유교 중심의 새로운 정치체제로 전환하게 된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성리학은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조선의 건국 이념, 국가 운영 원칙으로서 기능하게 되었으며, 새로운 왕조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확보하는 철학적 토대가 되었다.
태종과 세종 시대에 성리학은 제도화되며 교육과 관료 체계의 중심
조선은 성리학을 이념적 기초로 삼아 국가의 모든 제도를 설계하였다. 태종은 유교 질서를 기반으로 중앙 집권적 정치 체제를 확립하였고, 관료 체계를 정비하면서 성리학을 관직 진출의 핵심 기반으로 삼았다. 특히 과거제도가 더욱 정비되면서, 경전 이해와 주자학 중심의 성리학 지식이 고위 관료로 진출하는 데 필수적 요소가 되었다. 세종 대에 이르러 성리학은 더욱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제도화되었다. 그는 집현전을 설치하여 성리학자들을 모아 학문 연구를 장려하고, 훈민정음 창제와 같은 문화적 정책에도 성리학의 질서를 반영하였다. 유교 경전을 정리하고 교육 체계를 정비하는 한편, 지방 교육기관인 향교를 강화하여 전국적으로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성리학은 단순한 이념을 넘어서, 왕과 신하 간의 관계, 부모와 자식, 형제와 이웃 간의 질서를 규정하는 삶의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조선 사회가 개인보다 공동체, 감정보다 이성을 중시하는 문화로 형성되게 하였으며, 성리학은 곧 ‘조선적인 것’을 대표하는 사상으로 정착하였다. 특히 삼강오륜, 군신유의와 같은 유교적 윤리 규범은 법과 제도, 관습을 초월하여 조선인의 가치관 속에 깊이 스며들었다.
성종 대 이후 성리학은 정통 사상으로서 정치·사회적 규범
성종 시기를 기점으로 성리학은 조선의 정통 이념으로 확고히 자리 잡는다. 성종은 경국대전을 완성함으로써 법과 제도 속에 성리학의 질서를 명문화하였고, 유교 윤리를 바탕으로 한 왕도정치의 구현에 힘썼다. 이 시기부터 성리학은 단지 통치 철학이 아닌, 국민 개개인의 삶과 사고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규범이 되었다. 관혼상제, 가족 제도, 사대부의 윤리관, 여성의 역할, 농민의 도덕까지도 성리학의 틀 속에서 규정되었으며, 이는 조선이 500년 동안 유지된 장기 지속 가능성의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성리학의 경직성도 문제점으로 지적되었으며, 지나치게 원리주의적 해석은 당파 싸움과 사색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전기의 성리학 수용은 ‘도덕을 정치의 중심에 두는 국가’라는 전례 없는 모델을 실현한 사례였으며, 이는 단지 조선뿐만 아니라 후대의 동아시아 정치 사상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에도 조선 성리학의 유산은 한국 사회의 예의범절, 교육열, 가족주의와 같은 문화 요소 속에서 여전히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그 사상적 기원과 제도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한국 역사와 문화를 보다 깊이 있게 조망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