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누구에게나 다가오며, 인간의 삶에서 가장 확실한 미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음을 회피하거나 두려워하며 살아간다. 철학은 이러한 죽음의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해왔다. 죽음은 단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규정하는 중요한 축이다. 플라톤은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영혼은 존재한다고 보았고, 이를 통해 철학이란 곧 죽음을 준비하는 훈련이라고 말했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죽음은 감각이 없는 상태이므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이데거는 죽음을 통해 인간이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사르트르는 죽음을 부정할 수 없는 타자에 의한 사건으로 보았다. 이처럼 다양한 철학자들은 죽음을 단순한 종말이 아니라, 존재를 드러내는 계기로 받아들였다. 철학은 죽음을 숙고함으로써 삶의 본질에 다가가려 한다. 우리가 죽음을 사유할 수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삶을 더욱 진지하고 의미 있게 만든다.
죽음과 존재 - 하이데거의 실존적 접근
하이데거는 그의 대표작 『존재와 시간』에서 죽음을 ‘가능성 중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라 표현하며, 인간이 죽음을 자각할 때 비로소 진정한 존재로서의 실존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죽음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언제나 내 앞에 다가오고 있는 실존적 가능성이다. 그리고 이 죽음의 자각은 인간이 일상의 분산된 존재 방식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존재성을 자각하게 만든다. 그는 이를 ‘죽음을 향한 선취’라고 불렀고,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은 더 이상 ‘그들’ 속에 숨지 않고 자기 고유의 존재를 살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죽음은 삶의 부정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계기다.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할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된다. 이처럼 죽음은 실존의 본질을 비추는 거울이며, 철학은 그 거울을 응시하는 태도다.
죽음과 영혼 - 플라톤과 에피쿠로스의 대비
고대 철학에서도 죽음은 중심 주제 중 하나였다.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여 설명하며, 죽음 이후에도 영혼은 이데아의 세계로 나아간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철학자는 육체적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어 영혼의 정화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이러한 삶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물질주의적 관점에서 영혼 역시 육체와 함께 소멸한다고 보았다. 그는 "죽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감정은 헛된 상상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은 존재하지 않고, 죽은 후 우리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플라톤과 에피쿠로스는 서로 상반된 방식으로 죽음을 해석하지만, 공통적으로 죽음을 숙고함으로써 삶의 태도를 정립하고자 했다. 철학은 죽음을 사유함으로써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죽음과 타자성 - 레비나스와 사르트르의 시선
현대 철학에서는 죽음을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사르트르는 죽음을 ‘타인에 의한 사건’으로 보며, 내가 죽는다는 사실은 내가 아닌 타인이 알게 되는 것이기에, 죽음은 자기완결적인 경험이 아니라 타자적 차원에서만 규정된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죽음은 근본적으로 비경험적인 것이며, 나 자신이 아닌 타인의 시선 속에서 발생하는 존재의 단절로 이해된다. 한편, 레비나스는 죽음을 단순한 부재나 침묵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나타나는 윤리적 요청의 형태로 본다. 그는 타자의 죽음을 마주할 때, 나 자신의 책임과 윤리적 존재성을 자각하게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접근은 죽음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공동체적이고 윤리적인 사건으로 확장시키며, 우리에게 ‘타인의 고통’과 ‘타인의 소멸’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철학적 물음을 던진다. 결국 철학은 죽음을 통해 인간 존재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계 속에서 타자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