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같이 세계를 인식하며 살아간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감각을 통해 주변 환경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세계와 접촉한다. 하지만 이러한 지각(perception)이 과연 ‘진짜’ 세계를 반영한다고 믿을 수 있을까?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처럼,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실재의 모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인식론적 회의주의는 지각된 세계와 실재 세계 사이의 간극을 강조하며, 인간이 지각을 통해 파악하는 것은 언제나 해석된 결과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는 단순한 철학적 논의로 그치지 않는다. 오늘날 가상현실, 인공지능, 신경과학의 발전은 우리의 ‘지각된 현실’이 얼마나 조작 가능하고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내가 경험하는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야 한다. 이 글에서는 지각과 실재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인간 인식의 한계와 가능성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지각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가
철학에서 지각은 단순한 생물학적 감각 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주체가 세계와 만나는 근본적인 방식이며, 우리가 세상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틀이다. 그러나 이 지각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고 믿는 것은 순진한 태도일 수 있다. 경험론자들은 감각 경험을 지식의 기초로 삼지만, 이 경험이 언제나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리적 착시, 심리적 기대, 문화적 배경 등은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끊임없이 수정한다. 즉, 지각은 순수한 반영이 아니라, 구성된 해석이다. 이는 칸트의 ‘현상과 물자체’ 개념에서도 확인된다. 우리는 사물의 본질(ding an sich)을 알 수 없고, 오직 우리의 감성과 오성에 의해 구성된 ‘현상’만을 경험한다. 지각은 필연적으로 주관성을 포함하며, 이는 객관적 진실에 대한 회의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주관성은 인간의 인식을 풍부하게 만드는 원천이기도 하다.
가상현실과 인공지능 시대, 지각은 더욱 불안정해진다
현대 사회는 새로운 방식으로 지각의 본질을 뒤흔들고 있다. 가상현실(VR) 기술은 감각을 인위적으로 자극하여 실제와 구분하기 어려운 환경을 제공한다. 이때 우리는 가짜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진짜처럼 느낀다. 이는 지각이 본질적으로 감각 자극의 패턴에 의해 작동하며, ‘진짜’ 여부보다는 ‘어떻게 느끼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인공지능의 딥페이크 기술 또한 우리의 시각 정보를 조작함으로써 ‘보이는 것이 곧 사실’이라는 오랜 직관을 위협한다. 이러한 기술 환경 속에서 인간의 지각은 더 이상 신뢰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라 조작의 대상이 된다. 철학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지각의 신뢰성과 한계를 재조명하며, 우리가 진실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요구한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철학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의식의 참여 - 지각은 수동이 아니라 능동이다
한편 현대 현상학은 지각을 단순히 감각 정보의 수용으로 보지 않는다. 메를로퐁티는 지각이란 ‘몸을 통한 세계와의 관계’이며, 인간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활동적 과정이라고 보았다. 즉, 지각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의 의도성, 관심, 감정에 따라 달라지며, 같은 장면도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된다. 이는 지각이 언제나 의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감각은 물리적 자극일 수 있지만, 그 자극에 의미를 부여하고 세계를 해석하는 것은 전적으로 의식의 몫이다. 이처럼 지각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보는 것’이며, 이는 인간 존재의 해석적 능력을 드러내는 중요한 지점이다. 지각은 진실을 감추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만이 가지는 독특한 방식으로 세계를 열어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