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이란 무엇인가. 인간만이 가지는 독보적 능력일까, 아니면 생존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가. 철학은 오래전부터 이성을 인간 존재의 핵심으로 다뤄왔지만, 이성의 위치는 시대에 따라 달라져 왔다. 고대에는 신과의 교감을 위한 통로로, 근대에는 진리를 규명하는 절대 기준으로 여겨졌으며, 현대에 들어서는 오히려 도전받는 가치가 되기도 한다. ‘생각하는 존재’로서 인간은 이성이라는 능력을 통해 문명을 발전시켜왔지만, 동시에 그것이 만들어낸 전쟁, 착취, 환경 파괴 앞에서 ‘생각의 윤리’라는 문제를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묻는다. 인간은 왜 이성을 갖게 되었는가? 그것은 진리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단지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한 핑계인가? 이 글은 철학사 전반에 걸쳐 ‘이성’의 위치와 의미를 성찰하며, 우리가 다시 이성에 기대야 하는 이유를 조명한다.
플라톤과 데카르트의 전통 - 이성은 진리를 향한 통로인가
플라톤에게 이성은 현실 세계를 넘어서 이데아의 세계를 인식하는 도구였다. 감각은 늘 오염되어 있지만, 이성은 언제나 순수하게 진리를 지향할 수 있다는 믿음이 그의 철학의 토대였다. 이 전통은 데카르트에 이르러 더욱 정교해진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그의 명제는 이성을 존재의 근거로 격상시킨다. 데카르트는 이성적 회의를 통해 세상을 재구성하려 했고, 이성의 빛은 그 어떤 의심도 뚫고 나아가는 도구였다. 이러한 전통은 계몽주의로 이어지며, 인간의 이성이 만물의 척도가 될 수 있다는 낙관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과연 이성이 진리를 향한 무오류의 나침반일까? 우리가 경험한 현대사는 이 물음에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게 만든다. 오히려 이성은 수많은 거짓과 억압의 도구가 되기도 했다는 점에서, 그 역할은 다시 재고될 필요가 있다.
비판과 해체 - 니체와 푸코의 시선
니체는 이성 중심주의에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댔다. 그는 이성이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힘과 욕망을 감추기 위한 가면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니체에게 진리는 인간의 해석일 뿐이며, 이성은 절대적이지 않다. 이어서 푸코는 이성 자체가 역사적 산물이며, 권력의 작동 방식에 따라 규정된다고 분석한다. 정신병, 성, 감옥 등 푸코가 탐구한 영역은 이성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비이성이 정당화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비판적 전통은 이성이 더 이상 ‘무조건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만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성을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다. 이 비판은 오히려 이성의 오용에 대한 경계이며, 더 나은 이성을 향한 철학적 요구일 수 있다. 즉, 이성이 자기 자신을 성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이성이 된다.
실천의 도구로서의 이성 - 공동체적 삶을 위한 필요조건
현대 철학에서는 이성을 단순히 진리 탐구의 도구가 아니라, 공존과 협력을 위한 기반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많아지고 있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성을 ‘의사소통 행위’로 재정의하며, 이해를 위한 상호작용에서 이성의 윤리가 출발한다고 본다. 그는 우리가 대화를 통해 합리적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성에 기대하며, 그것이 민주주의의 철학적 기반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이성이 단지 머릿속 사유의 틀에 머물지 않고, 실제 사회 속에서 어떻게 기능하느냐를 중심으로 사고하려는 시도다. 다시 말해, 이성은 개인의 도덕적 판단뿐 아니라 공동체적 윤리의 조건이며, 우리의 삶이 ‘함께 사는 삶’이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구조다. 이성은 여전히 가치 있는 도구다. 다만 그것이 누구를 위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성찰하는 과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성은 생각하는 존재인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근본 능력으로 존속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