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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사유하는 철학 - 메를로퐁티의 지각 현상학

by simplelifehub 2025. 9. 4.

철학은 오랫동안 ‘정신’과 ‘이성’을 중심으로 인간 존재를 설명하려 해왔다. 그러나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이 전통에 균열을 내며,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의 근원에 ‘몸’을 위치시켰다. 그는 인간이 세계와 만나는 방식은 단순한 논리나 감각기관의 작동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몸’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그의 현상학은 데카르트식 이원론과는 대조적으로, 몸과 정신의 통합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탐구한다. 메를로퐁티에게 있어 몸은 단지 생물학적 기관이 아닌,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의미를 구성하는 ‘살아 있는 경험의 장’이다. 이 글은 메를로퐁티의 철학에서 ‘몸’이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매개가 되는지를 살펴보며, 우리가 일상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지각의 근본 구조를 새롭게 조명해보고자 한다.

몸은 세계를 여는 창이다

메를로퐁티의 지각 현상학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우리는 몸을 통해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는 시각, 청각, 촉각 등 감각을 통해 우리가 세상을 인식한다고 보면서도, 이 감각들이 작동하는 기반이 되는 ‘몸’의 존재에 주목한다. 우리는 책상 위에 놓인 사과를 보면서 단지 사과라는 대상을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색감, 거리감, 질감, 심지어 맛까지 몸을 통해 직관적으로 파악한다. 이때 몸은 단순한 수동적 수용체가 아닌, 적극적으로 세계를 해석하는 능동적 주체로 기능한다. 예컨대 눈을 감고도 손으로 물체를 만지며 그 형태를 알아차리는 과정, 혹은 익숙한 길을 무의식적으로 걷는 행위 모두가 몸의 지각적 능력을 반영한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가 세계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몸을 통해 늘 세계 속에 ‘현존’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언어 이전의 의미를 지각에서 찾다

메를로퐁티는 우리가 언어로 의미를 구성하기 이전에, 이미 지각을 통해 ‘의미’를 형성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의미는 텍스트나 개념이 아니라, 경험의 현장에서 먼저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아기가 말을 배우기 전에 엄마의 표정과 목소리 톤, 몸짓을 통해 의도를 파악하는 과정은 전적으로 지각적이다. 그는 이를 ‘표출된 의미(expressive meaning)’라고 부르며, 지각이 의미의 최초 형식임을 강조했다. 언어는 지각이 축적된 뒤에 나타나는 이차적 표현에 불과하다. 이러한 관점은 철학, 언어학, 심리학, 교육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간 이해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 영향을 미쳤다. 즉, 우리는 먼저 ‘느끼고’, 그 후에 ‘말하고’, 마지막으로 ‘이해한다’는 과정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기계화된 현대 사회에서 몸의 복권을 주장하다

메를로퐁티는 그의 철학이 단지 이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를 성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그는 근대 이후의 철학과 과학이 인간의 몸을 ‘객체’로 전락시켰고, 그 결과 인간은 자신의 몸과 분리된 채로 살아가게 되었다고 비판했다. 현대인은 스크린, 기계, 추상화된 정보 속에 빠져들며 몸의 감각과 리듬을 잊고 산다. 메를로퐁티는 이러한 경향에 맞서, 철학이 다시 몸의 감각을 회복하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예술, 특히 회화에서 몸의 지각적 표현이 어떻게 철학적 사유보다 더 근원적 진리를 드러낼 수 있는지를 탐구했다. 그에게 철학은 ‘몸으로 생각하는 방식’을 회복하고, 인간이 세계와의 살아 있는 관계 속에서 다시 자기를 찾는 길이었다. 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한 물음이며, 우리가 삶을 다시 느끼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중요한 철학적 실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