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흄은 철학사에서 경험주의의 핵심 인물로 손꼽히며, 인간 이해에 있어 이성과 감성이 어떻게 충돌하고 조화를 이루는지를 깊이 탐구한 인물이다. 그는 인간 인식의 기반이 ‘경험’임을 강조하며, 우리가 아는 모든 지식이 감각을 통해 축적된 인상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철학은 당시 주류를 이루던 합리주의적 사고에 일침을 가하면서도, 실천적 삶과 윤리의 문제에까지 깊이 닿아 있다. 흄의 사유는 인식론에서 출발해 윤리학, 종교철학, 정치철학에까지 걸쳐 있으며, 특히 인간의 의지와 행위, 도덕 판단의 근거를 ‘이성’보다도 감정에 두었다는 점에서 현대 심리학이나 인지과학과도 연결고리를 제공한다. 이 글에서는 흄의 경험주의 철학의 핵심 개념을 정리하고, 그것이 철학사에 미친 영향과 오늘날의 시사점까지 살펴보고자 한다.
인식은 경험에서 비롯되며, 이성은 그 후를 따를 뿐이다
흄은 인간 인식의 기초가 감각 경험이라는 점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모든 개념이나 사유가 결국에는 감각에 의해 주어진 ‘인상(impression)’에서 유래한다고 본다. 즉, 이성적 추론이나 복잡한 개념들조차도 원초적인 감각 경험을 벗어나지 않으며, 관념이란 결국 인상의 희미한 복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는 예를 들어 '금빛 산'이라는 개념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금’과 ‘산’이라는 감각적 인상에서 조합된 것이라 설명하며, 우리의 상상력조차 경험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유는 데카르트 이후 이어져 온 합리주의의 선험적 사고방식에 강하게 반기를 들며, 인간의 사고 역시 자연적이고 경험적인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함을 강조한다. 흄은 이처럼 경험을 철저히 중시함으로써 철학의 방법론적 전환을 촉진했고, 훗날 칸트로 하여금 '흄의 독설이 나를 잠에서 깨어나게 했다'는 고백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인과관계는 논리적 필연이 아니라 습관에 의한 신념이다
흄 철학의 가장 도발적인 지점은 ‘인과성’에 대한 비판이다. 그는 우리가 세상에서 원인과 결과를 인식할 수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필연성을 감각적으로 포착할 수 없다고 본다. 예를 들어, 공이 유리창에 부딪혀 깨지는 장면을 수없이 목격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인과적 필연은 경험할 수 없다. 우리는 단지 반복된 관찰을 통해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 기대할 뿐이며, 이는 논리적 필연성이 아니라 심리적 습관에서 비롯된 믿음이라는 것이다. 이로 인해 흄은 철학뿐 아니라 과학적 지식의 정당성에까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과학이 의존하는 법칙이나 예측이 결국은 경험적 반복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모든 지식이 본질적으로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흄은 이처럼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사고 체계를 흔들고, 철학이야말로 끊임없는 의심과 반성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일깨운다.
도덕은 이성이 아닌 감정에서 비롯된다
흄의 철학은 인식론을 넘어 윤리학에서도 독자적인 입장을 제시한다. 그는 도덕 판단이 이성적 계산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공감 능력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선하다고 판단하는 이유는 그것이 이성적으로 타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 내면에서 긍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관점은 ‘이성은 감정의 노예’라는 그의 유명한 표현으로 압축된다. 흄은 윤리적 감정의 보편성과 안정성은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를 통해 사회적 협력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는 현대 도덕심리학과의 접점에서도 의미 있는 통찰을 제공하며, 도덕성과 감정의 연결고리를 재조명하게 만든다. 흄은 인간이 이성적 동물이라는 고전적 정의를 넘어서, 감정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철학의 중심에 놓았다. 이러한 윤리학은 규범적 딜레마를 감성의 차원에서 재구성하게 하며, 도덕이 단지 규칙의 준수가 아니라 인간 사이의 정서적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것임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