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후반 미국 철학계에서 독특한 사유로 주목받은 리차드 로티는 철학의 전통적 기능에 대한 근본적인 재해석을 시도한 사상가다. 그는 철학이 객관적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라는 관념을 해체하며, 오히려 철학은 다양한 언어적 실천의 일부로서 사회적 연대와 윤리적 창조성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티에게 있어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형성되며, 이는 철학자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끊임없이 재구성해가는 이야기다. 그는 전통 형이상학을 벗어나 보다 실용적인 인간 중심의 철학을 지향했고, 그 과정에서 철학을 다시금 일상과 연결된 대화의 장으로 복귀시키려 했다. 로티의 사상은 현대 철학이 마주한 정체성과 역할의 위기를 날카롭게 지적하며, 철학이 어떻게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를 모색하게 만든다.
철학은 더 이상 진리를 대표하지 않는다
로티는 데카르트와 칸트로부터 이어지는 철학의 진리 중심주의 전통, 즉 ‘형이상학적 실재’가 존재하며 이를 파악하는 것이 철학의 임무라는 관념을 비판한다. 그는 이러한 전통이 철학을 비현실적인 추상 속에 가두었다고 보며, 철학이 오랫동안 유지해온 ‘거울 이론’, 즉 언어가 세계를 정확히 반영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문제 삼는다. 로티에 따르면,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수단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의 산물이며, 다양한 문화와 담론 속에서 그 의미가 구성된다. 이러한 관점은 철학이 특정한 진리나 보편 개념을 발견하는 학문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삶의 방식을 표현하고 비교하는 대화의 장이라는 새로운 위치를 부여한다. 철학자는 진리를 대표하거나 판결하는 권위를 지닌 전문가가 아니라, 공동체의 언어를 풍부하게 만들고 윤리적 상상력을 확장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실용주의는 철학의 새로운 가능성이다
로티는 철학을 실용주의적 전통 속에서 새롭게 해석하며, 진리 개념 역시 고정된 실재라기보다는 공동체 내에서 유용하고 설득력 있는 담론으로 보았다. 그는 듀이, 제임스 같은 미국 실용주의자들의 계보를 계승하면서도 이를 현대 사회의 지식구조와 연결지었다. 진리는 고정된 기준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하기 위해 끊임없이 협상하고 조율하는 과정에서 생성된다는 점에서 실용주의는 공동체 중심의 윤리와도 맞닿는다. 로티는 이러한 관점이 냉소주의나 상대주의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오히려 진리에 대한 절대주의적 집착이야말로 폭력적 배제를 낳는다고 비판했다. 실용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서로 다른 의견과 가치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갖게 만들며, 이러한 대화의 실천이야말로 철학이 기여할 수 있는 진정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실용주의는 철학을 다시금 인간 중심의 실천적 학문으로 회복시키는 열쇠로 작용한다.
철학은 사회적 연대를 위한 문학이 되어야 한다
로티는 철학과 문학의 경계를 허물며, 철학이 진정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냉정한 논리보다 공감과 상상력을 담은 이야기로 사람들을 설득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철학이 보편적 원칙을 내세우기보다는, 개별 인간의 고통과 삶을 이해하고 이를 언어화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그는 ‘잔혹함에 대한 민감성’을 윤리적 기준의 핵심으로 삼고, 철학이 추상적 도덕률 대신 구체적인 타인의 고통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티에게 철학은 연대를 위한 언어, 상처를 공유하는 이야기, 그리고 다름을 끌어안을 수 있는 상상력의 확장이어야 한다. 그는 철학이 더 이상 학문적 엘리트의 폐쇄적 장이 아닌, 사회적 공감과 윤리적 감수성을 키우는 공간이 되기를 바랐다. 이처럼 로티는 철학의 전통적 위상을 내려놓고, 그것을 보다 인간적이고 실천적인 대화로 전환하려는 시도를 통해, 철학이 여전히 오늘날의 삶과 공동체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