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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철학 - 쇼펜하우어가 본 존재의 본질

by simplelifehub 2025. 8. 26.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철학사에서 가장 비관적인 철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단순한 염세주의자가 아니다. 그의 중심 사상은 "의지"라는 개념을 통해 세계와 인간 존재의 본질을 파헤친다는 점에서 철저하고 치밀한 존재론적 탐구였다. 그는 칸트의 ‘물자체’ 개념을 계승하면서도, 그 실체를 ‘의지’로 규정하였다. 쇼펜하우어에게 세계는 이성이나 신의 이념이 아니라, 목적 없이 맹목적으로 충동하는 ‘의지’에 의해 구성된다. 이러한 의지는 인간을 끊임없는 결핍 상태로 몰아가고, 만족이란 순간적 착각일 뿐 지속적인 고통이야말로 존재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고통 속에서도 예술, 윤리, 금욕 등을 통해 일시적으로나마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제안한다. 이 글은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통해 인간 존재가 왜 끊임없이 괴로움에 시달리는지, 그리고 그로부터 벗어나는 가능성은 어떤 조건 아래 열릴 수 있는지를 탐색하고자 한다.

의지는 존재의 본질이자 고통의 근원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채 무언가를 욕망하고 추구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이를 ‘의지’라고 불렀으며, 이 의지는 목적도 없고 방향도 없이 단지 ‘원한다’는 사실만으로 존재를 구성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인간의 삶은 끝없는 결핍과 갈망 속에서 반복되며, 갈망이 충족되는 순간조차도 또 다른 결핍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고통은 필연적이다. 우리가 배고픔을 느끼는 것은 결핍의 신호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먹는 행위는 일시적인 해소일 뿐 곧 다시 갈망의 고리를 만든다. 이처럼 의지는 삶을 가능하게 하면서 동시에 고통의 근원이 되며, 인간은 이 의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와 같은 세계관은 전통적인 낙관주의와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인간 실존을 조망하게 만들었으며, 이후 니체, 프로이트, 카뮈 등의 철학자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삶은 고통이고, 예술은 일시적인 해방이다

쇼펜하우어에게 있어 삶의 본질이 고통이라면, 인간은 그 고통을 어떻게든 견뎌야만 한다. 그는 예술을 그 해방의 도구로 여겼다. 예술은 의지의 세계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관조를 가능하게 한다. 이를테면 음악은 인간의 의지를 가장 순수하게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그 의지에서 잠시나마 해방될 수 있는 경로라고 보았다. 회화나 문학, 조각 등도 마찬가지로 인간이 의지를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특히 음악은 쇼펜하우어 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음악이 형식적이지 않으면서도 가장 추상적인 방식으로 의지를 표현하는 예술이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예술적 체험은 인간이 의지의 고통에서 잠시 벗어나 ‘고요한 인식’ 상태에 도달하게 하며, 이 순간이야말로 삶의 비극성으로부터 유일하게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보았다. 예술은 비록 일시적이지만, 고통을 성찰하게 하고 존재를 다른 시각에서 이해하도록 만드는 철학적 도구가 된다.

금욕과 동정은 구원의 열쇠가 될 수 있는가

예술이 고통에서의 일시적 해방이라면, 쇼펜하우어는 보다 근본적인 구원을 위한 태도로 ‘금욕’과 ‘동정’을 제시한다. 금욕은 자신의 의지를 최소화하고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려는 실천이다. 이는 불교의 수행 방식과도 유사한 면이 있으며, 실제로 쇼펜하우어는 인도 철학에 큰 영향을 받았다. 금욕적 삶을 통해 인간은 욕망의 고리를 끊고 고통의 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한 그는 동정(연민)을 윤리의 기초로 보았다. 다른 존재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태도는 의지 중심의 자기중심적 존재에서 벗어나는 실천으로 여겨졌다. 이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고통만이 아니라 타자의 고통까지도 성찰하며, 그 고통을 줄이기 위한 도덕적 존재로 변화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에게 구원은 종교적 신념이나 초월적 개념이 아니라, 삶 속에서 욕망을 절제하고 타자를 이해하려는 실천을 통해 가능해진다. 결국 그는 비관을 넘어선 깊은 윤리적 통찰을 통해 고통을 마주하는 인간의 존재방식을 새롭게 그려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