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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동일성과 타자성 - 폴 리쾨르의 정체성 철학

by simplelifehub 2025. 8. 26.

폴 리쾨르는 현대 철학에서 ‘해석학’과 ‘현상학’을 통합한 사유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특히 인간의 정체성과 주체의 지속성에 관한 독창적 분석을 통해 윤리학과 철학적 인문학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그는 인간이란 단순히 동일성을 유지하는 존재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리쾨르는 정체성을 ‘동일한 나’를 뜻하는 ‘idem 정체성’과 ‘자기를 이야기로 구성하는 나’인 ‘ipse 정체성’으로 나누며, 자아의 구성은 서사적 이해와 기억, 약속, 책임이라는 윤리적 구조 안에서 실현된다고 보았다. 이로써 그는 근대적 고정된 주체 개념에서 벗어나, 타자성과 대화 속에서 스스로를 형성해가는 주체의 모습을 철학적으로 제시하였다.

아이덴티티의 두 층위 - idem과 ipse

리쾨르의 ‘자기 정체성’ 이론에서 핵심적인 구분은 바로 ‘idem(identity-as-sameness)’과 ‘ipse(identity-as-selfhood)’이다. ‘idem’은 우리가 동일한 사람으로 인식하는 객관적이고 반복 가능한 특성들을 의미하며, 나이, 직업, 외모 등 변하지 않는 속성을 통해 구성된다. 반면 ‘ipse’는 주체로서의 자신이 경험하는 내면적 정체성으로, 약속을 지키거나 책임을 감수하는 윤리적 주체의 성격을 강조한다. 이 구분은 인간 정체성의 복잡성과 변화 가능성을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 우리가 시간을 지나면서도 자신을 동일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은 단순히 외형적 특성이 아니라, 삶을 이야기로 엮어내는 내적 통일성 때문이다. 리쾨르는 이러한 관점을 통해 정체성이란 고정된 실체가 아닌, 지속적인 ‘서사적 자기 이해’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재구성하는 모든 과정에 윤리적 긴장을 부여한다.

서사적 정체성과 이야기의 힘

리쾨르는 인간의 자기 이해가 이야기(narrative)를 통해 구성된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서사적 정체성’(narrative identity)이라 명명하며, 인간은 삶의 다양한 사건과 경험을 이야기로 재구성함으로써 스스로를 이해한다고 주장한다. 이야기는 단순한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현재의 자신과 미래의 방향성을 구성하는 상상적이자 해석적인 행위다. 우리는 이야기 안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 어떤 책임을 지니는지를 규명하게 된다. 이때 이야기는 단절된 사건들을 연결하고, 주체의 삶에 통일성과 의미를 부여하는 도구로 기능한다. 따라서 리쾨르에게 있어 ‘이야기하기’란 단순한 표현이 아닌, 존재론적 작업이며 윤리적 자기 실현의 한 방식이다. 이를 통해 그는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것이 기억과 시간, 그리고 타자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성립되는 이야기라는 점을 밝힌다.

타자성과 윤리 - 책임지는 자기

리쾨르 철학의 또 다른 핵심은 ‘타자성과 윤리’이다. 그는 레비나스의 영향을 받아 ‘타자의 얼굴’에서 비롯되는 윤리적 책임을 강조했으며, 자아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완성된다고 보았다. 우리는 타자를 인식하고 응답함으로써 비로소 윤리적 주체가 되며, 이는 자율성과 자기 이해를 넘어선 도덕적 요구를 수반한다. 리쾨르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신뢰와 약속, 용서를 중요시하였고, 이 모든 것은 ipse 정체성에 포함된다. 타자와의 관계는 때로 우리 정체성을 흔들고 위협할 수 있지만, 바로 그 위기 속에서 우리는 더 깊은 자기 성찰과 성장의 기회를 얻는다. 따라서 그는 정체성이란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윤리적 과제이며 실존적 실천임을 강조한다. 이처럼 리쾨르의 철학은 인간 존재를 고립된 자아가 아니라, 시간과 관계, 기억과 이야기, 책임과 용서의 장 속에서 살아가는 주체로 그려내며, 철학적 인간학의 지평을 확장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