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베르그송은 시간, 의식, 기억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탐구하면서 기존의 기계적이고 분석적인 사유를 근본에서부터 비판하고, 삶 그 자체의 흐름을 포착하려는 새로운 접근을 제안했다. 그는 시간과 존재를 양적으로 분해할 수 없는 내적 흐름, 즉 ‘지속(durée)’으로 이해했으며, 이를 통해 인간 의식과 자유의 본질을 다시 사유할 것을 요청한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과학적 분석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삶의 질적인 흐름을 드러내고자 하며, 현대 철학은 물론 문학, 심리학, 예술 전반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지속은 분할되지 않는 내면의 흐름이다
베르그송은 시간에 대한 일반적 개념이 공간적 은유에 갇혀 있다고 보았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시계 시간이나 연대기적 시간은 균등하게 분할 가능한 점들의 연속이며, 이는 실재하는 의식의 흐름과는 거리가 멀다. 그에 따르면 진정한 시간, 즉 ‘지속’은 의식 속에서 경험되는 질적 흐름이며, 연속적인 감정과 기억의 중첩으로 구성된다. 이 지속은 물리적 시간처럼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덩어리로 살아지고 느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음악을 듣고 감동을 받는 순간, 각 음을 개별적으로 분해해서 이해하지 않고 전체적 흐름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의식은 연속적이며 비가시적 방식으로 진행된다. 베르그송은 이러한 지속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성의 분석이 아니라 ‘직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직관은 사물의 내부로 침투하여 그것이 어떻게 움직이고 흐르는지를 체험하는 능력이며,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철학적으로 파악하는 핵심 방식이라고 그는 보았다.
기억은 과거의 흔적이 아닌 지속 속의 창조이다
베르그송에게 있어 기억은 단순한 정보의 저장소가 아니라, 의식의 창조적인 구성 요소다. 그는 기억을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하나는 작동기억처럼 현재의 행위에 직접 연관되어 반복되는 습관적 기억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 전체가 고유한 형태로 응축되어 존재하는 순수 기억이다. 후자는 의식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다가 특정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되살아나며, 새로운 현재를 창조하는 역할을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보여주듯, 과거는 단순히 회상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감각과 접속되며 새로운 감정과 의미를 탄생시킨다. 베르그송은 이 과정을 ‘지속의 이중 운동’으로 설명하며, 과거와 현재는 고정된 구조가 아니라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교차하고 생성되는 실체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인간의 정체성 또한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기억의 지속 속에서 변화하며 재구성되는 열린 구조다. 이러한 사유는 인간 존재를 동적인 흐름으로 파악하며, 삶을 하나의 유기체적인 운동으로 조망하게 한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생명과 창조를 향한 철학이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단순한 시간론이나 기억 이론을 넘어서, 생명의 본질과 창조성에 대한 근본적 통찰로 이어진다. 그는 『창조적 진화』에서 생명을 ‘생명의 약동(élan vital)’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며, 생명은 반복과 기계적 재현이 아닌 끊임없는 창조와 도약을 통해 진화한다고 본다. 이 철학은 다윈의 진화론과는 다른 방향에서 생명의 자율성과 창조성을 부각시키며, 인간의 자유 또한 이러한 창조적 흐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특정한 순간에 특정한 선택을 하는 것은 단지 과거의 인과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과거 전체의 응축과 현재 상황의 조우 속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행위다. 이는 인간의 자유를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의지’가 아니라,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탄생시키는 힘’으로 보는 관점이다. 베르그송은 이를 통해 철학이 다시금 삶과 접속하고, 실재를 살아 있는 흐름으로 사유하는 작업이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그의 사유는 단순히 지적인 추구를 넘어,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고 해석하며 살아갈지를 근본적으로 되묻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