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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자아의 경계 -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이 전하는 철학적 통찰

by simplelifehub 2025. 8. 26.

앙리 베르그송은 시간과 기억에 대한 독창적 통찰을 통해 인간 자아의 본질을 탐색한 철학자이다. 그는 물리적 시간과 구분되는 '지속(durée)'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아는 고정된 정체가 아니라 흐름 속에서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이 글은 그의 지속 이론을 중심으로, 기억과 자아의 역동적 관계를 재조명한다.

물리적 시간과는 다른 삶의 시간, 지속

베르그송이 제시한 ‘지속’은 단순히 시계로 측정되는 균등한 시간이 아니다. 그는 물리학에서 말하는 객관적 시간은 인간의 내적 경험과는 전혀 다른 구조를 갖는다고 보았다. 지속은 흐르고 겹쳐지고 융합되는 시간으로, 인간의 의식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체험적 시간이다. 우리는 과거를 단절된 점으로 기억하지 않으며, 매 순간 과거와 현재, 그리고 기대하는 미래가 혼합된 형태로 의식을 구성한다. 이처럼 지속은 양적으로 측정될 수 없고, 질적인 변화를 담는 시간이며, 자아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전개되는 살아 있는 리듬이다. 베르그송은 이러한 지속을 통해 인간 자아를 파악하고자 했으며, 자아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화하는 흐름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예술과 직관, 감정 등 논리로 환원할 수 없는 인간 경험들이 지속의 영역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고 강조했다.

기억은 단순한 정보 저장이 아닌 자아의 형성 과정

베르그송은 기억을 단순히 과거의 경험을 저장하는 창고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기억은 지속의 일부로, 현재의 자아와 과거의 자아가 융합되며 새로운 의식의 장을 구성한다고 보았다. 인간은 끊임없이 과거의 기억을 현재의 맥락 속에서 재구성하고, 이러한 재구성은 자아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따라서 기억은 시간 속에 단순히 쌓이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자아를 만들어가는 유기적 과정이다. 베르그송은 이러한 관점에서 정신과 뇌를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으며, 기억이란 뇌의 특정 영역에 저장된 정보라기보다는, 전체적인 지속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경험의 총체라고 강조했다. 그는 ‘순수 기억’이라는 개념을 통해 감각적 자극 없이도 과거를 불러오는 능력에 주목했으며, 이는 인간이 단지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구성해 나가는 존재임을 뜻한다.

자아란 흐름이며,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베르그송에게 있어 자아는 변하지 않는 실체가 아니라, 지속이라는 흐름 안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존재다. 그는 자아를 고정된 개념으로 정의할 수 없다고 보았으며, 자아란 그때그때의 기억, 감정, 직관, 의식의 흐름이 유기적으로 구성해내는 결과물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같은 자아 개념은 전통적인 철학에서 말하는 실체 중심의 사고와는 거리를 두며, 인간 존재를 보다 유연하고 유기적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러한 시각은 현대 심리학과 인지과학, 그리고 존재론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자아의 유동성과 기억의 재구성 가능성을 강조하는 담론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인간이 기계적인 반응체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며, 삶과 의식의 진정한 본질은 그 흐름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결국 자아란 하나의 고정된 정답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구성해 나가야 할 열려 있는 문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