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 마르셀은 기술화된 현대 세계에서 인간 존재를 ‘문제’가 아닌 ‘신비’로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실존주의 안에서도 희망, 충실함, 사랑을 강조하며 타자와의 관계에서 존재의 깊이를 성찰한 철학자다. 이 글은 마르셀의 철학에서 존재론적 신비의 핵심을 탐구한다.
문제(problem)와 신비(mystery)를 구분하라
마르셀 철학의 출발점은 인간 존재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그는 인간의 존재를 ‘문제(problem)’로 접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문제란 외부에서 관찰할 수 있고 분석할 수 있는 대상이지만, 신비는 그 안에 내가 포함되어 있으며 온전히 파악될 수 없는 차원을 지닌다. 즉, 존재는 내가 외부에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참여’하고 있는 것이기에 단순한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르셀은 현대 사회가 인간을 객관화하고 수단화하면서 존재 자체를 문제처럼 다루고 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란 존재는 결코 분석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사물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며 끊임없이 열리는 신비로운 차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이 신비는 완전히 드러나지 않으며, 언제나 열려 있는 채로 우리를 부른다. 따라서 마르셀에게 있어 철학이란 신비와 함께 머무는 태도를 배우는 일이며, 존재에 대해 질문을 멈추지 않는 사유의 행위다.
기술 사회에서 인간다움을 지키는 법
마르셀은 기술의 발전과 물질 중심의 사회가 인간 존재를 도구화한다고 보았다. 사람은 점점 ‘역할’로만 존재하고, 관계는 기능적 교환으로 전락하며, 삶은 효율성과 생산성이라는 잣대에만 맞춰진다. 그는 이런 사회에서는 인간 고유의 가치인 희망, 충실함, 사랑과 같은 실존적 감정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고 경고했다. 예컨대 병원에서 환자가 환자번호로만 불리고, 노동자가 부품처럼 취급되는 현실 속에서 인간은 더 이상 고유한 ‘너’로서 존중받지 못한다. 마르셀은 이러한 비인간적 흐름에 저항하며 인간을 하나의 존재로서 다시 바라보는 태도를 회복할 것을 촉구한다. 그는 인간 존재가 단순히 기능이나 역할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드러나는 고유한 신비라고 강조한다. 기술은 인간을 편리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만남과 내면의 성찰은 기술로 대체할 수 없는 가치다. 마르셀은 이러한 내면의 세계를 되살리는 것이 철학의 역할이며, 인간이 인간다움을 지키는 방식이라 믿었다.
희망과 충실함, 그리고 타자에 대한 윤리
마르셀에게 있어 희망은 단순히 낙관주의적인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인간이 포기하지 않는 ‘존재에 대한 신뢰’다. 그는 희망을 단지 미래를 기대하는 감정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 존재하는 타자를 믿고 견디는 실천적 태도로 보았다. 마르셀은 충실함(fidelity)을 통해 관계의 지속성과 깊이를 강조하는데, 이것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하려는 의지이다. 이처럼 희망과 충실함은 타자와의 진정한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 되며, 인간이 고독과 고립을 넘어설 수 있게 해주는 철학적 덕목이다. 그는 또한 ‘너’라는 존재에 주목했는데, 인간은 ‘너’와의 관계를 통해만 진정한 ‘나’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사유는 단순한 존재론을 넘어 윤리학으로 나아가며, 타자와의 책임 있는 만남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핵심임을 드러낸다. 마르셀의 철학은 냉정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간 사이의 따뜻한 충실함과 존재의 신비를 다시 되새기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