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실존철학의 흐름 속에서 독특한 지점에 위치하며, 인간의 존재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고 보았다. 그는 객관화된 존재 개념을 넘어, 신뢰와 희망, 사랑이라는 관계적 요소를 통해 인간 실존을 탐구했다. 이 글에서는 마르셀의 '미스터리로서의 존재' 개념과 그가 강조한 초월적 희망, 그리고 현대 사회에 던지는 철학적 메시지를 살펴본다.
존재는 문제(problem)가 아닌 신비(mystery)이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존재를 단순히 분석하고 해체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존재는 문제(problem)가 아니라 신비(mystery)다”라는 말로 존재 개념의 근본적인 전환을 시도했다. 문제란 객관적 관찰과 분석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반면, 신비는 관찰자의 내적 개입 없이는 다가설 수 없는 실존적 체험이다. 마르셀에게 존재는 바로 그런 신비로서, 수학적 모델이나 과학적 방법으로는 결코 포착될 수 없는 대상이다. 그는 존재를 '경험하는 나'와 '존재하는 너' 사이의 관계 속에서만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관계는 단순한 정보 교환이 아닌, 신뢰와 응답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마르셀은 이런 관계적 실존을 통해 인간은 자기 초월을 이루며, 이로써 존재는 단순한 '있음'을 넘어선 '의미'로 확장된다고 보았다. 인간이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존재의 깊이를 체험할 수 있다는 그의 사유는 실존철학 내에서도 특별한 울림을 준다.
희망은 단순한 낙관이 아니라 실존적 확신이다
마르셀 철학의 또 하나의 중심 개념은 '희망'이다. 그는 희망을 단순한 바람이나 미래에 대한 기대가 아닌, 실존적 차원의 태도로 보았다. 희망은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한 계산이나 전략이 아니라, 현재 상황이 아무리 암울하더라도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신뢰에서 나오는 확신이다. 그는 희망이 “나는 내가 절망하지 않기를 희망한다”는 역설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는 인간이 절망의 가능성 속에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존재의 가능성을 신뢰한다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마르셀에게 희망은 실존적 위기 속에서 피어나는 가장 인간적인 태도이며, 인간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진실로 응답하고 응답받을 때에만 성립되는 것이다. 이 희망은 종교적 믿음과도 연결되며, 인간 실존의 초월 가능성을 열어주는 열쇠로 작용한다. 특히 기술과 소외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마르셀이 말한 희망은, 인간성 회복의 윤리적 기초로 작동할 수 있다.
현대 사회 속 인간 소외를 넘어서기 위한 철학
가브리엘 마르셀의 철학은 산업화 이후 인간이 점차 객체화되고 기능화되는 사회에 대한 깊은 비판을 내포하고 있다. 그는 기술 문명 속에서 인간이 서로를 '너'가 아닌 '그것'으로 취급하게 된 현실을 우려했다. 이메일, 스마트폰, 알고리즘이 인간 소통을 대신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는 그 속에서 점점 더 깊은 고립을 경험하고 있다. 마르셀은 이러한 소외의 구조를 극복할 방법으로 인간 상호 간의 ‘현존’과 ‘충실한 응답’을 제시한다. 서로를 단순히 수단으로 바라보지 않고, ‘존재하는 너’로 대면할 때 비로소 인간은 고립에서 벗어나고, 진정한 연대와 희망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팬데믹, 전쟁, 기후 위기 등 인간의 실존을 위협하는 요소가 증가하는 가운데, 마르셀의 철학은 인간다움의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가 무엇을 회복해야 하는지를 되묻게 만든다. 그는 단순히 분석하고 해답을 제시하는 철학이 아니라, 고요히 묻고 함께 존재함으로써 응답하는 철학을 우리에게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