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누엘 레비나스는 존재의 철학이 더 이상 인간의 타자성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는 ‘타자의 얼굴’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통해 윤리를 존재론보다 선행하는 철학적 원리로 제시한다. 본 글은 레비나스의 사상을 통해 타자의 요청과 책임이 인간 주체성의 기초가 되는 이유를 살펴보고, 현대 사회에서 윤리적 사유가 어떻게 새롭게 요청되는지를 성찰한다. 자기중심적 합리주의나 동일성 철학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우리는 왜 타자에게 응답해야 하며, 타자에 대한 책임은 어디서 비롯되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존재보다 앞서는 윤리란 무엇인가
레비나스는 서양 철학이 플라톤 이후 일관되게 '존재'에 몰두해왔다고 보았다. 존재를 이해하고, 세계를 해석하며, 사유를 확장하는 방식으로 철학은 전개되어왔지만, 이 과정에서 인간의 윤리적 관계성, 특히 타자와의 관계는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전통을 ‘동일성의 철학’이라 부르며, 모든 것을 자아의 관점으로 환원하는 폭력이라고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이제 ‘존재’가 아니라 ‘타자’를 사유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 그는 윤리가 존재보다 앞선다고 주장하며, 윤리는 어떤 이론이나 원칙으로 정립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얼굴과 마주하는 실존적 상황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그 얼굴은 말로 설명되지 않는 요청이며, 나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거기에 있음’으로써 나의 책임을 호출한다.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이러한 윤리는 규범 이전의 감응이며, 그 감응은 타자를 환원하지 않는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윤리는 그렇게 사유의 바깥에서, 혹은 존재의 침묵 속에서 다가오는 것이다.
타자의 얼굴과 비가시적 윤리
레비나스 철학에서 ‘타자의 얼굴’은 문자 그대로의 얼굴이라기보다, 타자성과 마주하는 상징이다. 얼굴은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장소이며, 나의 이해나 개념에 포섭되지 않는 완전한 타자성을 지닌다. 인간은 이 얼굴 앞에서 침묵하고, 설명하지 않으며, 다만 응답해야 한다. 이때 응답이란 윤리적 책임을 의미하며, 그것은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이미 나에게 부과된 구조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타자의 얼굴은 나를 윤리적으로 호출하고, 그 호출 앞에서 나는 이미 책임을 지고 있는 존재가 된다. 이는 칸트의 도덕 철학처럼 보편적 이성에 기초한 자율적 판단과는 전혀 다르다. 레비나스는 오히려 윤리를 이성의 계산 이전에 자리한, 말 없는 요청으로 본다. 그는 인간을 “타자의 인질”이라 부르며, 그 책임은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존재론적 조건이라고 말한다. 윤리는 그래서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타자 앞에서 내가 어떻게 있는지를 묻는 응시의 순간이다. 이처럼 레비나스는 윤리를 인간 내부에서 발생하는 규범이 아닌, 외부로부터 도래하는 초월적 요청으로 재정의한다.
현대 사회와 타자 철학의 실천적 의미
레비나스의 철학은 오늘날 다문화주의, 난민 문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태도 등에서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동일성을 중심으로 한 서구 철학은 타자를 배제하고, 이해 불가능한 존재를 위험하거나 불완전한 대상으로 간주해왔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오히려 이해되지 않음, 설명할 수 없음, 동일화되지 않음을 통해서만 타자는 타자일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타자를 완전히 이해하려는 대신, 이해하지 못한 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윤리의 시작점이다. 또한 그의 철학은 현대 민주주의의 윤리적 기반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다수의 정당성이나 법의 합리성 너머에, 타자의 고통과 요청을 듣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치적 담론이 권리와 자유에 머무를 때, 레비나스는 책임과 응답의 차원으로 이끌어간다. 인간은 타자의 고통에 책임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이며, 그 책임은 법이나 제도보다 더 근원적인 도덕적 근거다. 오늘날과 같은 복잡하고 다원적인 사회에서, 우리는 여전히 철학적 침묵 속에서 윤리적 요청을 들어야 하며, 그 요청은 레비나스가 강조했듯이 바로 타자의 얼굴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