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는 나치즘과 스탈린주의라는 20세기 최악의 전체주의 체제 속에서 인간 존엄성과 자유를 사유했던 정치철학자이다. 그녀는 유대인으로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후,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등에서 전체주의의 구조와 인간 내면의 조건을 치밀하게 분석하였다. 특히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은 전통적인 악의 개념을 뒤집으며, 깊은 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아렌트는 전체주의가 단지 폭력적인 권위주의 체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각을 멈추고 체제에 무비판적으로 복종할 때 일어나는 ‘비사유의 정치’라고 보았다. 그녀는 정치란 다수 속에서의 다양성과 의견 교환을 가능케 하는 장이라고 보았으며, 인간의 자유는 단지 개인의 내면이 아니라 공적 공간에서 타인과 함께 사유하고 행동할 때 실현된다고 주장했다. 이 글에서는 아렌트 철학의 핵심 개념들을 살펴보며, 현대 사회에서 전체주의적 경향과 도덕적 무감각이 어떻게 재현되는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해 본다.
전체주의는 악의 체계가 아니라 사유의 부재로부터 출발한다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제시한 가장 중요한 통찰은, 전체주의가 단순히 폭력과 억압의 체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녀는 전체주의를 기존의 권위주의나 독재 체제와 구분하며, 그것이 대중의 고립, 역사와 진실에 대한 체계적 왜곡, 이데올로기의 절대화 등을 통해 인간을 고립된 원자화된 존재로 만든다고 보았다. 전체주의는 무차별적인 동질성을 강요하며, 모든 다양성을 제거하고 개인의 고유성과 판단 능력을 무력화시킨다. 특히 그녀는 전체주의의 가장 무서운 점은 바로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관료적 명령이나 체제에 따르는 것을 ‘도덕적’이라 착각하게 되는 지점이라고 본다. 이때 ‘악’은 더 이상 괴물 같은 개인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단지 자신의 일을 ‘그저 수행할 뿐’일 때 발생한다. 전체주의는 결국 개인을 책임 없는 존재로 만들고, 판단과 성찰의 여지를 제거함으로써 악을 일상화시킨다. 이는 현대 사회의 각종 조직과 시스템 안에서도 반복될 수 있는 문제이며, 아렌트는 정치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사유하는 인간’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악의 평범성: 아이히만 재판이 드러낸 도덕적 무감각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본격적으로 제시한 것은 1961년 예루살렘에서 진행된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도하면서였다. 그녀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이히만이 사디스트나 광기 어린 악마가 아니라, 다소 멍청하고 자기 판단을 포기한 평범한 관료였음을 강조했다. 그는 상부의 명령에 복종하며 수백만 명의 유대인 학살을 조율했지만, 자신은 ‘법을 따랐을 뿐’이라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아렌트는 이 사례를 통해, 극단적인 악이 반드시 병적인 성격이나 극단적 증오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부재와 도덕적 책임의 회피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했다. ‘생각하지 않음’이야말로 악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며, 이는 특정한 시대와 인물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기업 조직, 군대, 국가, 학교 등 다양한 제도 속에서 개별 구성원이 자신의 판단을 유보하고 체제에 순응할 때, 우리는 모두 또 다른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도덕이란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는 능력이라고 보았으며, 이를 통해 개인의 자유와 윤리를 정치적으로 재정립하려 하였다.
정치는 공동의 세계를 열어가는 실천이며, 사유와 행동이 핵심이다
아렌트의 철학은 전체주의의 부정에 그치지 않고, 정치의 본래 의미와 인간 조건의 회복을 위한 긍정적 사유로 나아간다. 그녀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 존재를 노동, 작업, 행위 세 가지로 나누며, 그중 ‘행위’가 정치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행위는 타인과 함께 공적 공간에서 이뤄지는 자유로운 시작이며, 예측 불가능하고 복수성과 차이를 기반으로 한다. 아렌트에게 정치는 법률이나 권위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의견을 나누고 공동의 세계를 구성하는 창조적 실천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유란 고립된 내면의 활동이 아니라, 타인과 세계를 함께 사유하고 판단하는 능력이며, 이는 곧 자유의 조건이기도 하다. 그녀는 현대 사회가 점점 사적이고 소비지향적으로 변화하면서, 공적 공간이 사라지고 정치적 삶이 축소되고 있음을 비판하였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단지 제도의 문제 이전에, 시민 개개인의 무관심, 무사유, 책임 회피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아렌트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사점이 깊은 철학자이다. 그녀는 우리에게 묻는다. “생각하기를 멈춘 순간, 우리는 누구의 도구가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