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의 사회적 기원
테일러는 자기정체성을 개인의 내면적 선택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고 본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존재이며,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 또한 사회적 관계와 문화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다. 그는 정체성을 타자와의 대화 속에서 규정되는 ‘대화적 자기’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나의 자아는 고립된 실체가 아니라, 타인의 인정과 사회적 담론을 통해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이는 근대 철학이 강조한 자율적 주체 개념과 대비되며, 정체성 형성이 관계적 과정임을 드러낸다. 따라서 자기정체성은 개인적 자유의 산물인 동시에, 사회적 관계 속에서 유지되고 발전하는 역동적 구조라는 것이다.
현대성의 모순과 위기
테일러는 현대 사회가 이룩한 성취를 인정하면서도 그 부작용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근대적 자유주의는 개인의 권리를 확대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발전했지만, 동시에 공동체적 가치의 약화와 의미 상실을 초래했다.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은 늘어났지만, 무엇이 ‘좋은 삶’인가에 대한 공통의 기준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이는 도덕적 상대주의와 무관심을 낳으며, 사회적 연대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 테일러는 이를 ‘현대성의 딜레마’라 부르며, 자유와 다양성을 유지하면서도 공적 가치를 회복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분석은 현대인이 경험하는 소외와 불안을 철학적으로 해명하는 동시에, 새로운 윤리적·정치적 전망을 제시한다.
공적 가치의 회복과 철학의 역할
테일러는 자기정체성과 현대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철학이 공적 담론의 장에서 적극적으로 기능해야 한다고 본다. 그는 개인주의가 완전히 부정될 필요는 없지만, 그것이 공동체적 책임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현대 사회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공동선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는 단순히 정치적 제도 개혁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도덕적 성찰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 과제이다. 테일러의 철학은 현대인이 자기정체성을 구성하는 방식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제공할 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의미와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궁극적으로 그의 사상은 개인과 공동체가 균형을 이루는 사회를 모색하며, 현대성의 위기를 넘어서는 철학적 지평을 열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