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정의 — 조화로운 질서의 실현
플라톤은 『국가』에서 정의를 논하면서 개인과 사회의 구조를 밀접하게 연결 지었다. 그는 이상국가를 세 계급으로 구분하였는데, 생산자, 수호자, 통치자가 각각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때 정의가 실현된다고 보았다. 정의란 각자가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고 타인의 역할을 침범하지 않는 상태, 즉 전체가 조화롭게 기능하는 질서라고 규정된다. 이는 정의를 단순히 법적 규범이나 도덕적 덕목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유지되는 원리로 확장하는 사유다. 개인의 차원에서도 플라톤은 인간 영혼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이성이 욕망과 기개를 조화롭게 다스릴 때 정의로운 삶이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결국 정의란 균형과 조화를 통해 공동체와 개인이 동시에 잘 기능하도록 만드는 원리이며, 이는 그의 이데아론과 결합하여 궁극적 진리에 가까워지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롤스의 정의 — 공정으로서의 정의
20세기 정치철학자 존 롤스는 『정의론』을 통해 새로운 정의 개념을 제시하였다. 그는 정의를 '공정으로서의 정의'라고 부르며, 합리적인 개인들이 무지의 베일 속에서 공정한 합의를 도출한다고 가정하였다. 무지의 베일이란 개인의 사회적 지위, 재능, 계급을 모른 채 모든 사람이 동등한 조건에서 사회 원칙을 선택하도록 만드는 사고 실험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선택될 원칙은 누구에게도 불리하지 않은 공정한 기준이 될 수 있다. 롤스는 이를 통해 두 가지 정의 원칙을 제안했다. 첫째, 모든 사람은 기본적 자유에 대해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둘째, 사회적 불평등은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익이 될 때만 정당화될 수 있다. 이 원칙들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의를 바라보는 중요한 틀이 되었으며, 복지국가와 사회적 안전망의 정당성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한다.
플라톤과 롤스의 대화 — 고대와 현대 정의론의 만남
플라톤과 롤스의 정의론은 출발점과 맥락에서 차이가 크지만, 공통적으로 사회 전체의 질서를 보장하는 규범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만난다. 플라톤은 계급적 역할 분담과 조화를 강조하며 정의를 집단적 조화로 이해한 반면, 롤스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기반으로 사회적 합의 과정을 중시했다. 플라톤의 정의는 위계적이고 목적론적 세계관에 기초하지만, 롤스의 정의는 평등한 출발점과 합리적 협의 과정에 기초한다. 그러나 두 사상 모두 정의를 단순히 법의 집행이나 보상 개념으로 축소하지 않고,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한 근본 원리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철학적 중요성을 공유한다. 오늘날 정의 논의에서 플라톤의 조화론은 사회적 역할 분담의 필요성을 일깨우며, 롤스의 정의론은 불평등 문제에 대한 공정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 둘을 종합하면 정의는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질서를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복합적 과제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정의는 변하지 않는 본질적 가치이면서도, 시대와 사회에 따라 새롭게 해석되고 적용되는 살아 있는 철학적 주제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