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의 도와 무위 — 무는 비어있음이 아니라 근원이다
노자의 『도덕경』은 도의 개념을 통해 '무'를 중심에 둔다. 그는 “도가도 비상도”라 말하며, 언어로 규정된 모든 것은 참된 도가 아니라고 선언한다. 이로써 노자는 존재 이전의 상태, 즉 '무'에 철학적 무게를 둔다. 그의 사유에서 무는 단순히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존재의 생성과 변화의 원천이다. 노자는 '항상 무로써 그 묘를 관한다'고 했으며, 무는 사물을 생성하게 하는 비가시적이면서도 근본적인 에너지다. 무위(無爲) 또한 무의 연장선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억지로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자연의 이치에 따르는 삶을 지향한다. 여기서 무는 존재의 부재가 아닌,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배경이며, 생성의 역동을 품고 있는 잠재성으로 기능한다. 동양 철학에서 무는 결코 결핍의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충만한 가능성의 장이며, 모든 존재가 돌아가야 할 본래적 자리이자, 궁극적 통찰의 지점이다.
하이데거의 '무'와 존재에 대한 물음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과 이후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들』에서 '무'를 본격적으로 철학의 중심 문제로 끌어올렸다. 그는 “왜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을 통해 존재와 무 사이의 긴장 관계를 드러낸다. 하이데거에게 무는 존재의 부정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를 드러내게 하는 조건이다. 인간은 불안이라는 근본 정서를 통해 존재자들이 무로부터 사라질 수 있음을 인식하고, 이때 비로소 존재 자체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하이데거는 이를 통해 존재가 무로부터 의미를 부여받는다는 역설적인 통찰을 제시한다. 서양 전통 철학에서 무는 대개 존재의 결여, 악, 부정성으로 취급되어 왔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러한 전통에 균열을 내며, 무를 존재의 배후에 위치한 메타적 요소로 간주한다. 그는 무를 통해 존재가 밝혀지고, 존재에 대한 사유가 가능해진다고 본다. 이로써 무는 단순한 없음이 아닌, 존재를 사유하게 하는 철학적 자극으로 재정의된다.
니시다 기타로의 장소론 — 무를 통한 주체의 해체
일본 근대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는 서양과 동양 사유를 융합한 철학을 통해 '무' 개념을 철학의 중심에 놓았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장소의 논리'로 설명하면서, 모든 존재와 인식은 궁극적 장소인 '절대 무' 속에서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니시다는 이 '절대 무'를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모든 것을 포괄하고 열어주는 기반으로 보았다. 여기서 무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모든 활동과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살아 있는 장이다. 니시다는 서구의 주체 중심 사유를 비판하며, 자아 역시 무에서 나오고 무 속에서 사라진다는 관점을 견지했다. 이는 자아의 고정된 실체성을 부정하고, 관계성과 공허성을 통해 인간 존재를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그의 철학은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무를 존재의 조건으로 보지만, 더 나아가 무를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사유의 기반으로까지 확장한다. 니시다에게 무는 단지 존재를 드러내는 조건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아를 해체하고 다시 구성하게 하는 적극적 사유의 장이었다.